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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무게_이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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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918회 작성일 18-05-3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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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8.05.31 칼럼

죽음의 무게

이기록

 

 

얼마 전, 또 한 명의 소방관이 사망했다. 최근 제천 참사를 비롯해 대형 화재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자 부산소방본부에서는 소방전술훈련을 실시했다. 평소보다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 대처하고자 했다. 이번에 사망한 소방관은 하루 평균 3건 이상의 현장 출동을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소방본부가 무리하게 실시한 훈련을 모두 마쳤다. 그렇게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14년 경력의 소방관은 아내와 12, 6살 두 아이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급성 심정지였다. 그리고 그날 나 역시 친구 한 명을 잃었다.

 

그 소방관은 대학 때부터 우정을 이어온 나의 친구다. 친구 아내의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황망하고 급한 마음을 안고 달려갔다. 사진으로만 남게 된 친구의 영정 사진을 보자 말은 나오지 않았다. 친구와 함께한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젊은 나이에 먼저 간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만 남을 뿐이었다. 늦었지만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전하려 계속 발걸음을 했다. 마주하기 어려운 마주함으로 감당하기 힘든 시간을 보냈다. 동료 소방관들이 오고 가고, 친구들과 가족 친지들이 함께 슬퍼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죽음을 맞이한 친구가 위험순직으로 처리 안 될 수도 있다는 말들이 오고 감을 알았다. 현장의 죽음이 아니라는 이유로, 훈련 장소가 아닌 훈련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 죽었다는 이유로 순직할 수 없는 이유가 되어 논의 대상이 되었다. 분명 훈련을 받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사망을 하였는데도 친구의 죽음과 훈련이 충분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단지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안 된다는 듯.

 

소방관들의 처우에 대한 기사들은 예전부터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소방관들의 물품을 자비로 구입해서 쓰고 있다거나 여러 가지 사건 사고로 소방관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기도 했다. 구급대원들은 주폭에 의해 욕설을 당하거나 구타로 인해 사망하기도 하는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보도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는 그들의 죽음이다. 그러나 사회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안전은 뒤로 밀어 둔 그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담보로 제시했을까? 화재를 비롯한 사건 사고는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다.

 

죽음의 무게를 생각한다. 이규보는 <슬견설>이란 작품에서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같다고 했다. 누군들 죽음이 두렵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언제든 죽음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직업을 택한 그들에게 막연히 희생만을 강요한 것은 아닐까? 그들은 무엇 때문에 힘든 훈련을 거듭하고 현장에서 화재와 구급상황을 거듭하고 있는 것일까? 죽음 이후의 그들의 삶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일까? 모두 자신의 신념에 따라 가족에게 미안함을 품으며 살아왔던 그 순간들이 어떻게 어느 장소에서 죽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을까? 이런 불합리한 상황들이 만연해 있다는 건 아직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음을 알려준다.

 

정권이 바뀌고 새 대통령이 당선된 지 1년이 지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 다음과 같은 공약을 제시했다. 소방관의 법정 인원 확충, 지방 공무원에서 국가 공무원으로의 전환, 소방관의 의료제도 마련 등을 약속했다. 소방관들의 부상치료와 순직기준의 불합리를 없애고, 순직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예우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지금까지 어느 정도 해결되었는지 모르지만 소방관이란 직업을 선택해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그들의 정신을 숭고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는 우리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소방 관련 공무원이나 경찰관들의 죽음은 이유를 불문하고 당연하게 위험순직 처리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들의 위험순직 처리는 당연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희생을 바란다는 것은 적어도 그들의 행동이 하루가 되었든 십년이 되었든 백년이 되었든 언제나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국가가 그들의 신념을 보상해 주고 남은 가족들이 그들의 희생을 지속적으로 기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 아닐까? 단순히 훈련 중이나 업무 중이란 단서를 달지 않고 앞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모든 이들이 인정받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예전에 친구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제 편한 자리에서 일할 수 있지 않냐고 말이다. 친구는 현장이 좋다고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편한 자리보다 힘든 일을 선택했다. 어쩌면 친구의 선택이 자신의 죽음을 더 빨리 부른 것은 아닐까 먹먹해진다. 소방관으로서의 직무에 충실하려 했던 친구에게 자주 안부를 묻지 못한 것이 더욱 후회된다.

 

친구의 관이 화장터로 들어갔다. 짧은 삶을 살고 간 친구의 마지막 여정을 지켜보았다. 더는 헌신한 이들의 죽음이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되새기는 심정으로 글 한 잔을 친구에게 바친다.

 

 

PS : 원고를 보내기 하루 전 친구의 아내는 순직처리가 불투명한 상태라고 청와대 국민청원에 글을 올려둔 상태다.

 

 

 

- 시 쓰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