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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하는 사람들_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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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4-05 10:50 조회1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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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8.04.05 칼럼

증발하는 사람들

김민지

 

 

요즘 일본 경제가 호황이다. 그 유명한 버블 붕괴로 찾아온 잃어버린 20년을 끝낸 것이 극우 총리의 이름을 딴 공격적인 통화 정책이었는지, 아니면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발생한 노동력 부족이었는지, 나로선 확실히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본 경제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방금 전 문장은 진실을 담고 있을까? 언론이 보도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일리가 있어 보인다. 대졸 청년들을 모셔가기 위한 일본 기업 간의 치열한 경쟁, 0%대 청년 실업률로 인한 공무원 기피 현상, 한국 청년들의 일본 취업 도전 등의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보다 합리적인(=높은) 최저임금제도, 남에게 잘 간섭하지 않는 문화,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은 한국 청년들에게 일본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를 새롭게 심어주고 있다. ‘헬조선에 대한 대안으로 열도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레나 모제와 스테판 르멜의 책 <인간증발: 사라진 일본인들을 찾아서>는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현실을 들려준다. 일본에선 매해 약 10만 명의 사람들이 증발한다. 갑자기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가족과 직장을 내던진 채, 어디로 가는지 일언반구도 없이, 심지어 이름과 그간의 인생까지 고스란히 내버려 두고 없어진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부부는 증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쫓으며 일본의 심층부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책은 서로 잘 연결되지 않는 모자이크들로 이루어져있다. 증발, 일본말로 -하츠가 텍스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지만, 책을 구성하는 이야기들은 파편적이다. 작가는 때론 당사자의 목소리로, 때로는 자신의 목소리로 일본의 인간증발을 설명한다. 경제적 실패, 가족과 친구에 대한 미안함, 견디기 어려운 수치심, 도시 생활에 대한 환멸, 사회적 차별 등 사라지는 이유도 제각각이다.

 

사라지는 일본인은 명문대를 졸업한 금융회사 직원일 수도 있고, 사회적 낙인을 안고 살아가는 부락민 출신일 수도 있다. 요컨대, 모든 일본인이 언제든지 증발해버릴 수 있다. 증발은 스스로의 선택이지만, 일본 사회는 그 선택을 유도하는 듯하다. 세계 경제 3위라는 덩치에 걸맞지 않은 빈약한 사회보장제도,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 노동자를 쥐어짜는 회사. 사람들을 증발로 내모는 사회적 조건이 잘 갖춰진 셈이다.

 

이렇듯 0에 수렴하는 일본의 실업률에 가려진 건 그들이 껴안지 못한 빈곤과 절망의 그림자다. 책에서 등장한 일본인들은 증발 문제를 쉬쉬한다. 하지만 그 외면의 결과는 사회 심층부에 자리 잡은 불안이다. 불안은 언제 솟구쳐 흐를지 모르는 마그마처럼 일본 열도의 지각 아래에서 유동하고 있다.

 

그래서 에필로그에서 폐허가 된 후쿠시마를 이야기한 저자의 선택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인간증발과 후쿠시마의 비극은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 폭발과 그 이후의 대처는 일본 사회의 병폐를 집약해서 보여준다. 어떤 일본인이 증발을 선택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양하겠지만, 구구절절한 사연의 기저에는 일본이 만들어왔던 성과제일사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후쿠시마 폭발 이후 국민들에게 거짓 정보를 쏟아내던 정부와 그런 정부에 항의조차 제대로 못 하는 국민들은 이 사회구조의 피해자이자 부역자다.

 

책을 덮고 나자, 이 모든 내용이 곧 여기에서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허약한 복지제도, 나를 옥죄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 한번 실패하면 영원히 실패자로 낙인찍히는 문화, 노동의 가치를 저평가하는 사회, 한국은 이런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다. 흔히 하는 말처럼 한국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일본을 따라 간다. 이 말이 참이라면, 한국에도 조만간 자발적 증발을 선택하는 사람이 생겨날 것이다. 어쩌면 벌써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늘어나고 있는 무연고 사망자의 수는 인간증발의 징후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결국 우리 앞의 서늘한 미래를 예언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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