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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시간의 층위3_정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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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2,040회 작성일 18-02-0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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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8.02.01 기행문

세 가지 시간의 층위3

- 재일동포 유적지 답사 및 교류, 동포넷 16차 방문단 인상기 -

정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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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역사박물관은 두 개 층, 3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었다. 1층 전시실에는 채탄 현장의 사실적인 디오라마가 눈길을 끌었다. 검은 때 앉은 훈도시만 걸친 탄갱 노동자들의 모습은 백여 년 전 사람들의 모습 같지가 않았다. 축 늘어진 젖무덤을 고스란히 드러내놓은 여성 노동자들의 모형에서 굳이 문명인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무용한 짓 같았다. 티비에서 자주 보아온 원시 부족의 삶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채굴한 석탄을 등짐 지고 있는 디오라마를 오래 쳐다보고 있기 어려워 걸음을 재촉했다. 박물관은 치쿠호 탄광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각종 영상 자료를 준비해놓았고, 미쯔이 타가와 이타 갱의 미니어처 조감도도 마련해놓고 있었다.

이층에는 제2전시실과 제3전시실이 있었다. 3전시실은 타가와 지방의 역사와 민속을 테마로 한 향토 역사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다. 일본 내의 가장 오래된 말토용과 각종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내게 흥밋거리가 될 리 없었다. 2전시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Memory of the World)인 야마모토사쿠베에 콜렉션이 전시 중이었다. 야마모토사쿠베에는 그 자신이 탄광노동자로서 체험을 바탕으로 치쿠호 탄광에서의 일과 생활을 기록화로 남겼다. 현재 이곳엔 탄갱 기록화, 일기 등의 627점이 소장되어 있단다. 기록화는 두 뼘 크기의 먹 또는 수채로 그려져 있고, 1890년대부터 1940년까지 치쿠호에서 있었던 다양한 생활, 문화, 사회정서 등을 담고 있었다. 그림의 여백마다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문이 담겨있어 주요한 기록 유산으로의 가치가 더욱 높은데, 색이 지워진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리기와 쓰기를 이어가는 작가의 집념이, 기록자로서의 사명감 앞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러나 이는 온전한 존경으로 뻗어갈 수는 없었다. 박물관 어디에도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나 추모의 염, 또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인정이나 위령비에 대한 안내 따윈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 석탄기념공원을 빠져나오며 저들이 딛고 선 땅의 평화로움 아래 깊이 잠든 과거 조선인들의 고통을 떠올리며 애꿎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는 십여 분 즈음 달려 후쿠오카현 타가와군 소에다조 오아자, 휴가묘지에 닿았다. 우리는 여전히 과거 탄광지대였던 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검은 떼 앉은 역사를, 거리를 여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자각에서 놓여나고 싶었던 걸까. 머릿속이 산만하게 미끄러진다. 어른 키만 한 철망을 끼고 인적 드문 도로와 인접한 오솔길을 오르는 동안, 꼭 한 번 이 같이 경사 있는 산길을 걸었던 기시감이 등허리를 간질였다. 산길이야 다 계서 거기지, 하면 더 할 말이 없지만, 이 서늘하고도 웅혼한 느낌을 주는 길이 어디 흔할까. 좀 오래된 기억이지만, 그래도 헤집어 들어가자며 입을 꾹 다물고 내쳐걸었다.

십 년도 더 전에, 나는 대학 새내기였다. ‘새내기란 말, 쓰고 보니 참 어여쁘다. 그러나 이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만날 취한 채로 붉다 못해 거무죽죽한 낯으로 희망 없는 캠퍼스를 허정거리고만 있었다. 어쨌든 나는, 당시의 그들 모두는 새내기였다. 그들 덕분에 2학년으로 밀려난 헌내기들도 실상 스물한 살밖에 안 됐는데, 그런 작위를 얻다니지금에야 우습기만 하지만, 그땐 서로에 대한 무궁한 가능성과 호기심으로 저희 깐엔 얼마나 깍듯했던지. 내가 그런 시절을 통과했다는 게 좀체 안 믿긴다. 게다가 딴에는 매사에 얼마나 심각했던지 동아리 활동에도, 짝사랑에도 요령 없이 진지하기만 했었다. 그 도를 넘는 진지함 때문에 때로 타인들의 부담을 사기도 했으리라. 내 어설픈 짝사랑의 상대였던 헌내기의 마음을 차지하는 데 실패했음은 물론이다. 당시는 사랑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실패 그 자체에 몰두하는, 그럼으로 비운의 주인공으로 스스로를 내모는 데에만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렇게 차곡차곡 채운 비감으로 어느 봄밤, 나는 동기놈 하나와 진탕 취했다. 더 극적으로, 더 제대로 취하기 위해 우리는 사하구 하단동의 에덴공원으로 올랐다. 낮부터 들이부었던 우리는 오후 네 시 즈음 제대로 된 판단력이란 걸 완전히 내팽개칠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오르기 시작한 에덴공원이란 곳은 동기놈의 자취방 바로 뒤의 둔덕으로, 나름 수풀이 빼곡한 사유지였다.

등이 축축하게 젖어들 만큼 산을 올랐을 때, 그곳에서 우리는 작은 봉분 하나를 만났다. 길도 나 있지 않은 곳만 골라 걸었던 우리였기에 무덤의 존재를 맞닥뜨리자 오소소 좁쌀 같은 소름이 돋았다. 그쯤 자리 잡고 술판을 벌이려고 했던 난 일부러 눈도 주지 않고 더 깊은 곳으로 걸음 옮기는데, 뒤따르던 녀석이 쓸데없는 소리로 날 겁주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잠들기만 하면 가위에 눌리는데, 아무래도 너무 오래 동정이어서 처녀귀신이 못 살게 구는 게 아닐까하는 것이었다. 듣다듣다 그만해, 이 자식아!”하고 새된 고함을 지르고야 녀석의 입이 닫혔다.

봉분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져 오소소 돋았던 잔소름이 대패로 밀린 것 마냥 사라질 즈음, 가방에서 소주와 마른 오징어를 꺼냈다. 겨우 강소주는 면했지만, 허리띠처럼 질기고 짜기만 한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자니 대체 여기까지 왜 올랐는지 모르겠다는 회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동기놈이래봤자 얼굴 트고 말 튼 지 몇 달이나 됐다고 할 말도 떨어졌다. 하여 우리는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네가 불러봐라.”, “니가 먼저 해라.”, “자슥이 술이 덜 취했나.” 맞다. 우리는 미친 사람처럼 해지는 산에서 노래를 부르기 적당할 때까지 더 들이붓고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차비 걱정에 끼니 거른 날 / 몇 날인지 몰라도 / 빈속 찌르는 아픔 그것이 / 세상의 고통이라 여기고 // 백화점 옷이 이제 더 이상 / 나의 것이 아닐 때 / 스물넷 꿈 많은 나의 인생이 / 허무하다 생각 말았으면 //’ 그때 불렀던 노랫말들이 지금도 선하다. 얼마나 선하냐면, 그 악보들을 머릿속으로 그려가는 동안 차마 부끄러움에 눈을 질금 감게 되는 부분마저도 왜곡 없이 선명하다. ‘혁명의 길에 육 년 째 / 지쳐 도망치고 싶을 때 // 이까짓 육 년은 너무 짧다고 / 허나 우린 이만큼 왔다고 / 노래하며 살았으면어디 그날 불렀던 노래가 이 한 곡뿐이랴. 숲속의 밤이 도심보다 이른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 밤이 제법 이슥해지도록, 속속들이 어둠에 갇힐 때까지 목이 쉴 때까지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러다 한참을 울고 웃다 제법 널찍한 소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은 채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덜덜 떨리는 아래턱을 훑고 지나는 바람에 눈을 뜨자, 산이 온통 희붐한 보랏빛에 잠겨있었다. 같이 있던 놈은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추위와 불안이 왈칵 휘감았다. 그다지 깊이 들어온 것 같지는 않은데, 무턱대고 걸음을 재촉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실연의 주인공이었던 난 이젠 조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결말을 예측할 수 없다는 데에서 두려움이 턱밑에서 출렁거렸다. 얼마나 더 허둥댔을까. 저만치 멀리 빠끔 봉분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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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가지 시간의 층위4>에서 이어집니다.

 

 


- 부산민예총 사무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