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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석탑1_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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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2,002회 작성일 18-01-17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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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8.01.18 짧은 소설

미륵사지 석탑

김민지

 

 

근데 익산에 다른 건 뭐가 있지?”

글쎄, 뭐 문화재 같은 거 있지 않나?”

익산은 그거잖아, 귀금속 가공 산업

 

1월의 평일 오후, 한 프랜차이즈 카페 2층에서 도시에 관한 이야기와 노래 소리가 흘렀다. 중앙에 자리를 잡은 세 사람이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익산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곧 그들이 만날 여행지, 전라북도 북쪽 어딘가에 위치한 곳, 옛 지명은 이리.

 

그냥 미륵사지 보러가는 거니까. 다른 거 볼 거 없으면 그거만 보고 오자.”

진짜 딱 미륵사지 석탑만?”

그래, 사실 우리가 요즘 뜨는 예쁜 카페, 이런 곳 찾아갈 건 아니니까.”

 

세 사람의 여행은 복원이 끝난 미륵사지 석탑을 봐야한다는 A의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오래전에 무너진 유물을 다시 만드는 행위의 숭고함과 수고로움을 생각해보라며, A는 두 친구를 설득했다. 결국 그들은 익산에 가기로 결정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으로. 이들의 여행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최신 곡 가사들이 히터가 내뿜는 공기 사이로 단조롭게 맴돌았다.

 

세 사람이 알고 지낸지는 약 7년이 다 되어 간다. 20112월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이었다. 갓 수능을 친 20살들의 어딘가 어정쩡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하나 둘 강의실로 들어왔다. ABC도 그 틈에 섞여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선배들의 몇 마디가 그렇게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던, 낯선 하루였다.

세 사람은 집이 가까웠고, 그래서 수업이 끝난 뒤 같은 교통편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특별하다고 강조하는 20살이라는 시기를 함께 통과하며 많은 걸 나누었다. 누구는 연애를 하고, 누구는 공부를 하고, 누구는 열심히 대학생활을 즐겼지만, 결국 그들은 함께 귀가하는 사이였다. 청년 세대를 가리키는 위로와 연민의 수사학이 범람하던 시절. 세 사람은 마치 거센 물길을 지나는 작은 배의 선원들처럼 항해하고 있었다.

 

야 근데 석탑 볼 수 있는 거 확실하나?”

. 볼 수 있을걸. 복원 다 끝났으니까.”

떠나기 이틀 전 세 사람은 자주 가는 카페에서 만났다. 48시간이 지나면 여행을 떠나지만 그렇게 큰 설렘은 없었다. 여권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땅을 벗어나야하는 것도 아니었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소백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저 너머로 건너가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여정은 오히려 일상적인 일로 여겨질 정도였다.

가방은 다 챙겼나?”

가방이 뭐가 필요한데, 내일 대충 챙기면 되지.”

그러게, 어디 멀리 가는 거도 아니고.”

 

A는 바빴다. 흰 화면에 자신의 인생과 경험과 성격과 취미를, 학점과 토익 점수와 한자 자격증과 인턴 이력을 새겨 넣어야 했다. 졸업이 초읽기에 들어갔지만 아직 자신이 소속될 일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리 놀랍지도, 특별히 좌절하지도 않았다. 취업에 유리한 전공도 아니었고 수월한 시대도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큰 야망도 욕심도 없었다. 그런 것들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포기하면 좀 가벼워질 줄 알았으니까.

포기는 출발선이었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 건 콘크리트 밀림 속 어딘가에 자신의 좌표를 입력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바쁘게 자판을 두들기는 A의 손이 그 사실을 체감하고 있는 듯 했다.

 

익산은 국수가 맛있대.”

B가 노트북을 보며 말했다.

B는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졸업을 했다. 일단 졸업을 하고 그 뒤를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학교를 떠난 후 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교직 이수를 해놓은 것이 다행스러웠다. B1년은 그의 맞은편에 앉은 이들보다 느리고 매끄럽게 흘렀다. 집 근처 독서실로, 또 카페로 흘러들어 인강을 듣고, 필기를 하고, 그것들을 외우고, 여느 고시생과 마찬가지로 돌출되지 않고 반복되는 시간을 보냈다.

예감이 썩 좋진 않지만 무사히 시험을 치렀다. 주위에선 격려했다. 붙을 거야. 잘 될 거야. 합격할거야. 내뱉어진 말들이 그의 귓불에 부딪혀 튕겨나갔다.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밝고 따뜻한 공간을 찾아 밀물처럼 밀려든 손님들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어느덧 카페 마감 시간이 되었고, 세 사람도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낮을 어둡게 했던 구름은 사라지고 커다란 달이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바쁘게 인사한 뒤 각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C는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버스를 기다리며 얼었던 다리가 풀리며 노곤해진 그는 눈을 감았다. 방금까지 읽다 나온 소설 속 장면이 떠올랐다. 벌레로 변한 남자의 이야기. 명문대와 각계기관이 선정하는 수많은 필독서 목록에 올라있는 고전.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벌레가 된다면 어떨까. 그는 생각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을 때, 벌레가 되어있으면 어쩌지. 그는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린 C는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전거방과 칼국수 집, 꽃집, 돈가스 가게, 주택이 이어진 길은 깜깜했다. 길모퉁이 편의점만 불을 밝혀주고 있었다. 편의점 앞을 지나는 C의 머릿속으로 벌레로 변한 남자의 이야기가 다시 비집고 들어왔다. C1분전 걸어왔던 어두운 길과 벌레로 변한 남자의 이야기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고민하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모자가 누르고 있는 그의 고개는 쉽사리 돌아가지 못했다.

 

여행날 아침, 세 사람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버스에 올라타 별 의미 없는 잡담을 나누다가 잠들었다. 휴게소에 들르고, 다시 잠을 청했다. 일찍 시작된 만큼 피곤한 출발이었다.

익산까지는 4시간 가까이 걸렸다. 처음 방문하는 도시의 공기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여느 지방 소도시와 다를 바 없는, 비슷한 풍경이었다. 영남과 호남의 비이성적인 대립관계로 인한 심리적인 거리감도 이들과는 무관했다. 한국은 어딜 가나 똑같을 테니까. 수도가 아닌 곳들의 위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미륵사지를 보기로 했다. B가 찾은 국수집을 찾아갔다. 세 사람 모두 만족스럽게 끼니를 해결했다. 날씨는 추웠지만 견딜만했고, 도시는 작았지만 넉넉했다. 순조롭게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여행이 미풍을 받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야 근데 우리 자고 가나?”

모르겠다. 어쩌지?”

나도 모르겠는데. , 어떡할까?”

세 사람은 아직 이 여행이 당일치기가 될지, 아니면 12일이 될지도 정하지 못했지만, 석탑을 찾아 스마트폰 지도를 열심히 따라가며 걸었다. 미국에 있는 최첨단 기업이 알려주는 대로 가면 탑이 있을 테니까.

조금만 더 가면 된대.”

드디어 미륵사지 석탑의 그 웅혼한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세 사람은 A의 단어 선택에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곧 있으면 그들의 눈앞에 탑이 나타날 것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만들어졌고, 짧은 순간에 무너져버렸고, 또 오랜 시간동안 방치되었다가, 다시 오랜 시간동안 복원된 석탑이 세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었다.

처음 여행을 제안한 A는 약간 흥분되었다. 다분히 그의 취향에 따라 떠나게 된 여행이었다. 자신의 기대가 충족되길, 옆의 두 사람도 즐거워하길, A는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