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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일_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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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1-11 15:49 조회2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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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8.01.11 짧은 소설

성스러운 일

김민지

 

 

아직 해가 뜨지 않았지만 남자는 몸을 뒤척이며 정신을 차렸다. 얼굴에 대충 물을 끼얹고 칙칙한 패딩 점퍼를 걸치고 장갑을 찾았다. 전기장판이 놓인 이부자리 근처를 벗어난 부분은 온통 차가운 한기로 가득하다. 한참이 지났을까, 남자는 주머니 안에 장갑이 있단 사실을 알고 안도하며 서둘러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남자의 오래된 휴대폰 화면에 AM 04:00이 보인다. 아직 첫차도 움직이지 않는 시간. 길 건너 번화가에서 정신없이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리는 시간. 남자의 동네에는 새벽 공기를 전하는 바람만 돌아다니고 있다. 몸에 살짝 한기가 돌았는지 움츠러든 그의 몸은 이내 곧게 펴졌다. 남자는 고개를 들고 성큼성큼 하천변을 향해 걸어갔다. 번들거리는 검은색 가죽장갑을 낀 그의 두 손은 주머니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듯 주먹을 쥐고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게양대에 걸린 깃발은 어젯밤과 똑같은 모습으로 걸려있었다. 남자는 제법 긴 숨을 토하며 깃발을 바라보았다. 짙은 초록색 직사각형 위에 그려진 노란 동그라미, 그 안에 자리를 잡은 초록빛 나뭇잎, 그리고 그 아래에 새겨진 3음절의 단어. 남자는 이 나라의 사람으로서 자신이 느끼는 자긍심이 이 깃발 속에 녹아들어있다고 생각했다. 나랏일은 똑똑하고 잘난 윗사람들이 하는 것이지만, 자신 같은 평범한 일반인들도 작게나마 나라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것이 바로 이 새마을 깃발이었다.

 

60년 넘게 살아온 인생에서 그런 뿌듯한 감정을 전해주는 상징은 거의 없었다. 1953년에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남자는 부모님의 희생 덕에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고, 곧바로 회사에 취직해 돈을 벌었다. 그 당시 대학생들은 데모를 하며 대통령을 욕했다지만, 그는 그들에게 동의할 수 없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먹고 살만해졌는데 뭐가 불만이란 말인가.

그가 스스로 돈을 벌 무렵부터 전국에 초록색 깃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한반도 남쪽의 새벽을 깨우는 소리는 더 이상 닭의 울음소리나 어머니의 애정 어린 잔소리가 아니었다. 종이 울리고 노래가 흐르며 새 아침이 밝았음을 알렸다.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나와 마당을 쓸었다. 초록색 깃발과 닮은 모자를 쓰고 완장을 찬 청년 몇몇이 열심히 새 세상을 만들자며, 좋은 나라를 만들자며 사람들을 격려했다. 남자는 벌써 그때부터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데모꾼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남자는 속으로 생각했었다.

남자의 인생은 평범한 삶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남자 아이 하나와 여자 아이 하나를 낳았다. 한 두 번의 이직을 경험하긴 했지만 직장 생활도 무던히 해내었다. 큰 말썽 피우지 않고 꼬박꼬박 아내에게 월급을 가져다주는, 다정하지는 않지만 맡은 바 책임은 다 하는 보통 가장이었다. 스스로도 그렇다고 믿었다. 퇴직한 후에는 적정한 수준의 연금과 원룸 임대 수입으로 풍족하진 않지만 고달프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최근 자신의 기여로 만들어진 나라가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 많지만, 전반적으로 큰 불만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남자가 이른 새벽에 차가운 공기를 마셔가며 집 근처 게양대로 출근하는 이유는 우연히 들었던 대화 때문이었다. 2주 전 하천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남자는 본의 아니게 두 젊은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 아직 저런 게 있네.” “그러게.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저런 걸 자랑이라고 걸어 놓지?” “야 여기 너희 동네잖아. 어휴, 쪽팔리겠다.” “야 우리 저기 낙서할래?” “? 낙서? , 괜찮은데?” 두 젊은 사람은 낙서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며 연실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대화를 듣는 순간 욱하는 화를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한 마디해서 불필요한 소란을 만들긴 싫었다. 그러다 곧 그의 머릿속에 서늘한 공기가 가득 찼다. 남자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정말로, 저 두 젊은 사람이 낙서를 해버리면 어떡하지? 그들이 지워지지 않는 펜을 들고 와서는, 외롭게 걸려 있는 저 깃발에 온갖 우스꽝스럽고 상스러운 말을 해버리면 어쩌지? 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더 이상 한 발자국을 뗄 수 없었다. 남자는 뒤를 돌아 깃발을 쳐다봤다. 초록색 깃발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햇빛을 받으며 흔들리고 있었다. 노란 동그라미 아래 흰색으로 써진 3음절의 글자가 남자의 눈에 가득 찼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두 젊은 사람은 이미 저 멀리 가버리고 없었다.

 

그날 남자는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눈을 감고 이불을 머리 위로 잡아당겼지만 반복되는 이미지가 수면을 방해했다. 낮에 본 두 젊은 사람이 깃발에 낙서를 한다. 초록색 깃발은 만신창이가 되고, 사람들은 그런 깃발을 보며 손가락질하고, 냉소적인 얼굴로 큭큭거린다. 자기 인생의 자긍심이었던 존재가 괴롭힘 당하고 부정당하는 장면을 남자는 견딜 수 없었다. 남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깃발 게양대로 향했다.

다행히 깃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깃발은 깨끗했다. 남자는 안도하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이제 매일 저 깃발을 지켜야겠다. 언제 그 놈들이 올지 몰라.’ 남자의 새벽 출근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진 그의 수고 덕분에 깃발은 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다. 남자는 온전한 초록색 깃발을 바라보며 낯설지만 기분 좋은 벅차오름을 느꼈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과 헌신을 인정받는 듯 했다.

 

오늘도 깃발 곁에서 2시간을 보냈다. 이 계절의 해가 게으름을 부리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불만은 없었다. 추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젊은 두 사람이 언제 찾아와 낙서를 해댈지 모르니까. 남자는 아내에 비하면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부류는 못되었지만,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딘가 성스럽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지었다.

바쁘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실은 자동차와 버스가 도로를 달리고, 해가 멀리 보이는 산 중턱에서 붉은 얼굴을 드러내면 남자의 고귀한 일도 막바지에 이른다. 남자는 그 젊은 두 사람이 필시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밤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완전히 날이 밝아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면 남자는 기쁜 마음으로 귀가할 것이다. 이렇게 깃발을 지키고 난 뒤부터 아침밥맛도 좋아지고 몸도 개운해졌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깃발을 지켜냈다는 자부심과 함께.

 

남자의 등 뒤로 초록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초록색 배경에 노란색 동그라미, 그리고 흰색 3음절의 글자가 새겨진, 오래된 깃발이다. 게양대에 달려있는 고리에는 밧줄이 깃발을 단단하게 묶어주고 있다. 한번 묶인 밧줄이 풀리면 골치가 아파질 구청직원이 미리 손을 써 둔 까닭에 절대 풀 수 없는 고르기우스의 매듭처럼 꽉 고정되어 있다. 교체할 일도, 하강식을 진행할 일도 없기 때문에 깃발은 저 높이, 우뚝 솟은 게양대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다. 그리스 신화의 거인이 찾아와도 겨우 손이 닿을 정도로 지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주먹을 앞뒤로 휘저으며 걸어가던 남자는 고개를 돌려 깃발을 바라보았다. 게양대에 매달린 깃발은 근방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서 펄럭이며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내일도 깃발을 안전하게 지켜줘야겠다며 속으로 다짐했다. 남자는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집으로 향했다.

 

 

- 대학원 박사과정, 미학을 공부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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