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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시간의 층위2-2_정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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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2,027회 작성일 17-12-2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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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일본은 중일전쟁을 벌이면서 자국의 노동력이 부족하자, 전쟁에 필요한 석탄을 캐기 위해 조선인들을 끌고 갔다. 이렇게 강제 동원된 조선인의 수는 약 67만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주로 탄광과 시멘트 공장 등에서 일을 했을 이들은 일본 전역에 배치되었으며, 이곳 후쿠오카 지역에만 약 20만 명이 있었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원 어느 곳에도 이들의 존재는 철저하게 지워져있다. 유일하게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굴뚝 뒤 언덕 사면을 올라 만난 타가와 위령비였다. 아래는 타가와 위령비의 전문이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生物(생물)은 다 저마다의 삶을 누리고자 한다. // 소리개(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고기는 뭇()에서 뛰노는 것은 그들이 모두 때를 만나 마음껏 저들의 삶을 즐기는 것이다. 微物(미물)이라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萬物(만물)靈長(영장)이라는 人間(인간)에 있어서야 더 말해 무엇하랴. 大韓帝國末期(대한제국말기) 合倂(합병)이라는 이름 아래 日本(일본)不義(불의)恣行(자행)한 일이 많은데 其中(기중) 하나는 第二次世界大戰時(제이차세계대전시) 韓國人(한국인)强制(강제)徵用(징용)하여 犧牲(희생)시킨 일이다. // ()故國(고국)父母(부모) 妻子(처자) 兄弟(형제) 姉妹(자매) 親知(친지)를 떠나 () 설고 물 설며 風俗(풍속)人情(인정)이 다른 異國(이국)땅에 끌려와 戰爭(전쟁)投入(투입)되고 勞役(노역)에 시달리다가 夢象(몽상)에서도 그리던 父母(부모) 妻子(처자) 故國山川(고국산천)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갔으니 그 寃痛(원통)()이야 어느 때無情(무정)歲月(세월)은 흘러 이제 四十*(사십*)이 되었으며 世上(세상)은 많이도 ()하였다. 歲月(세월)이 흐르면 이런 悽慘(처참)한 일도 묻혀질 것 같아서 이 땅에 살고 있는 同胞一同(동포일동)은 한 조각 돌비를 세워 否塞(비색)國運(국운)을 만나가신 님들의 ?魂(원혼)을 길이 **하고 다가오는 세상에는 이런 不幸(불행)한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鏡戒(경계)徵表(징표)로 삼고자 하오니 冥界(명계)英靈(영령)이시어 지난 *(*)을 모두 잊으시고 고이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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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삽하게 들러붙는 생각의 잔가지 때문에 비문(碑文)을 따라 읽는 것이 힘겹다. 세월 속에 옅게 지워지고, 읽지 못하는 한자는 문맥을 통해 추측해가며 겨우 읽어나가는 주제에, 꼴에 글 쓰는 사람의 자의식이 되똑 튀어나온다. 정연하지 못한 문장이 턱턱 받치는 것이다. 표준 정서법(正書法)과는 거리가 생겨버린 비석 속 저 말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유효할까. 언어가 생명이라는 사실이 새삼 얄궂게 느껴진다. 얄궂고, 선뜩하며, 또 서글프다. 잊지 말자고, 잊히지 않기 위해 이리 높이 세운 비석도 깎여나가고, 글자는 지워지는데, 언어랄 것, 망할 것, 내 오늘 눈으로 읽어낸 이 비문이 내일도, 모레도 길이 남을 수 있을까. 영원 같은 건 일 푼이라도 가닿을 수 없는 유한자의 존재론적인 슬픔이 몸을 차게 감싸고돌았다. 고개를 돌린다.

멀리 칼로 잘라낸 듯한 석회 산허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걸 보고 있는 내 심사가 또 조금 복잡하게 헝클어진다. 자연을 인간에 복무하도록 만드는 의지에, 짧은 순간 경외가 들었다가 결국 그악스러움을 느끼고는 절로 다시 고개가 돈다. 욕망이란 미명으로 합리화되는 모든 진실들을 외면하고만 싶다. 허나 이 마음만은 외면해선 안 되리라. 들으니, 이리 높은 곳을 찾아 위령비를 세운 이유가 수직갱 깊은 곳에 한 생을 묻은 자들더러 넋이라도 굽어보라는 의미란다. 내 혀는 부질없는 말을 굴린다. 그렇게 하시길이 어리석은 우리들을, 현대인들을 한 순간도 감지 말고 보아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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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가지 시간의 층위3>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