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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_김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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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967회 작성일 17-11-13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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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7.11.13 짧은소설

이사

김마음

 

 

마감 시간이 다 되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종일 내릴 것처럼 흐리긴 했지만 막상 내린 비는 느닷없다면 느닷없었다. 천둥과 함께, 가을비답지 않은 억수가 왜소하고 과묵한 위성도시를 모처럼 요란하게 만들었다. 가게 안은 오늘의 마지막 닭 튀기는 냄새로 가득했다. 홀에는 인근 마트, 아마도 계약직, 상품 운반이나 매대 진열 일을 하는 세 명의 손님이 있다. 그들이 자리를 비우면 남편과 나도 정산을 마치고 튀긴 닭 한 마리를 챙겨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 때 한 중년 남성이, 뒤따라 청년 하나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리 맥주랑 닭 한 마리 싸갈 거거든요.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가 준비한 재료가 다 떨어져서요라고 말해야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네 손님,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아버지가 하릴없이 가게를 둘러보는 사이 아들이 구석 테이블의 의자를 빼고 앉는다. 애매한 길이의 더벅머리를 하고 추리닝을 입은 청년이다. 남편이 주방에서 나를 건너보며 나만 볼 수 있게 미간에 가는 주름을 잡는다. 남편은 잘 생겼다. 콧날도 매섭고 눈도 깊고 입매도 유려하다. 그러나 내가 사족을 못 쓰는 것은 저 양 눈썹 사의의 주름이다. 진짜 화를 내기는 못해도 짐짓 화난 척은 잘 하는 그는 그런 척을 할 때마다 저 주름을 만들었다. 그러기도 했지만 불안감이 섞인 설렘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를 때도 그랬다. 교제, 동거, 결혼, 그를 처음 만난 후로 저 주름이 내 삶의 중대한 선택을 이끌어왔다. 매장을 둘러보던 청년의 아버지가 문득 남편의 얼굴에서 잠시 눈길을 멈춘 것도 남편의 잘생김 때문이다. 저 남자는 변방의 닭 튀기는 필부로는 어색하리만치 잘 생겼구나. 그리고 아버지는 이내 자신의 심각한 편견에 머쓱해진다. 그는 검은 면바지와 와이셔츠를 입은 채로 슬리퍼를 신고 있다. 말이나 걸음에서 술기운이 느껴지지만 만취하지는 않았다. 퇴근 후 동료들과 가벼운 회식을 가지기로 했는데 정말 가벼운 회식이었던 나머지 자택에 돌아와 한 잔 더 걸치려 했으나 안주거리가 없었기에 신발만 갈아 신고 우리 가게를 찾은 것이다. 그는 그저께 푸른숲빌라로 이사 왔다. 그곳은 비 오는 날 우리 가게에서 닭을 포장해 들고 가기에 충분히 가까운 유일한 주택 건물이다. 어찌나 가까운지 요란한 사다리차 소리가 매장의 닫힌 문 안으로 비집고 들어올 정도였다. 생맥주 혹시 싸갈 수 있나요? 새삼 갓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는 잔을 기울이지 않고 따른 생맥의 거품만큼이나 보글보글한 기분이 됐다. 예 손님, 천 씨씨부터 포장 가능하시구요. 그는 천 씨씨를 주문한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릴없이, 그러나 꼭 아버지의 시선과 겹치지 않게 매장을 둘러보던 아들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든다. 새로 장만한 탓이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 스마트폰 자체를 다뤄보지 못한 품이다. 갓 제대한 그는 복학을 위해 자취를 시작하기 전에 부모님과 되바라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살갑지도 않은 동거를 하고 있다. 부자의 유대는 왜소하고 과묵하다. 둘은 도무지 말이 없다. 페트병에 생맥주를 담은 내가 아버지에게 그것을 건넨다. 그는 카드로 맥주 값과 닭 값을 미리 지불한다. 사무를 보는 직장인의 차림새인 그의 손은 그러나 투박하고 굳은살이 박인 전형적인 기술자의 손이다. 고맙습니다. 그의 말씨는 서울말과 동남방언이 섞여 있지만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별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오래전에 한 사람 고유의 말씨로 만들어졌다. 그는 김포공항과 김해공항에 여러 차례 발령이 난 일이 있는 항공사 정비부서의 책임자급 직원이다. 얼마 전 다시 발령이 난 김해공항이 정년까지의 마지막 근무지일 것임을 직감한 그는, 결코 봉급이 좀스럽지 않은 직업과 직책을 가졌음에도 삶의 여러 사정과 여러 풍파로 내 집 마련할 엄두를 못 내던 생활을 이어오다, 초로를 코앞에 둔 때에 이르러서야 큰마음을 먹고 오롯이 자신의 몸과 이름이 함께 사는 집을 마련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모험은 다름 아닌 정착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앞으로 더 살아봐야 알겠지만, 그는 적어도 지금 자신의 기분은 매우 보글보글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치킨 나왔습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은 묵묵히 아버지의 손에서 닭과 술이 든 비닐봉지를 건네받으려 한다. 비는 서서히 잦아들다 곧 그친 듯했지만 아버지가 아들에게 비닐봉지를 들게 할지 말지 망설이는 그 찰나에 느닷없이 그친 느낌도 든다. 부자는 다행히 우산을 펼치지 않아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 망상질이지. 주방 정리를 하며 남편이 말했다. 뭐 어때, 불법도 아닌데. 내가 대답했다. 사실은 마트에서 일하는지 동사무소에서 일하는지 내가 알 길이 없는 세 명의 손님도 돌아간 후였다. 정신 챙기고 돈 세라 돈. 그의 애교 섞인 핀잔에 내가 대꾸했다. 몇 마리 팔았다고 셀 돈이 있겠니. 아닌 게 아니라 닭 파는 일은 녹록하지 않다. 점포 월세와 2인 가구 생활비를 가까스로 벌게 된 것도 기적이다. 타인의 과거만큼 나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즐기는 나다. 은설시 어정동은 썩 살기 좋은 동네지만 내가 상상하는 미래의 내 세계는 그보다 더 넓었다. 그나저나 내 닭 어쩔 거야. 마지막 손님에게 야참을 빼앗긴 남편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나 정말 화가 나도 잔뜩 났지 뭐야. 그래, 저 놈과 함께라면 삶에 몇 번의 중대한 선택 정도는 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맨날 맡는 닭 냄새 물리지도 않냐, 물리지도 않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 대학원 아직도 휴학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