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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해명解明_임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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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957회 작성일 17-10-10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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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7.10.05

가을의 해명解明

임기현

 

 

나는 거세 당했어

그 말을 할 때

작은, 여자, 후배, 아이가

시가 무섭다고 말할 때

 

가을은 옵니다

창작과비평 가을호를 샀습니다

필사했습니다

심사평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보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새 입이 아니라 새 눈과 새 사유에서 진정한 새로움이 오는 것이라 믿는다

그건 믿음이 아니라 해명 같기도 합니다만

내 것이 아닌 글을 내 손으로 옮겨 적으면

좀 더 필사적인 기분이 듭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저를 썼는데

저는 새가 아니라서

 

투고할 때

시와 시 사이에 띄워지는

그 공간이 싫었습니다

제 시는 애매한 길이라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면 한 줄뿐인데

시는 끝났으니까

다음 시를 옮겨야하니까

연달아 엔터를 누르는

그 순간이 싫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굴욕적이고

죄송한 마음으로

엔터를 누르면서 어딘가로 떨어지는 기분이

어쩌면 나는 아직도 시를 끝내지 못한 게 아닐까

내가 쓴 시들이 실은 다 한 편인 건 아닐까

이건 아주 긴 이름 같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비평과 창작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가을이 되고 맙니다 저는

졸업에 대해 생각하면

졸업이었습니다만

뒤에서 누군가 또 저를 부르고

호명한다는 게 어떤 심사평처럼 느껴져서

무서운 선배와 후배를 향해

입과 눈과 사유를 줄이고 돌아봅니다 저는

믿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무서운 후배와 선배를 위하여

 

가을이 가고 있습니다

날씨는 을()의 기분처럼 쉽게도 풀어집니다

밝은 표정으로 높아지는 구름

처음 보는 무언가를 닮았습니다만

 

저는 이제 새에 대해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쓴 글을 누가 읽어주는 것은 더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