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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한 면쯤_박정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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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2,018회 작성일 17-09-0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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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7.09.07 서평

마음의 한 면쯤

최영철 시집 금정산을 보냈다를 읽고

 

박정웅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영향을 피할 수 없다. 태어나고, 자라며, 서서히 늙어간다. 달리 말하자면 출생의 순간부터 죽어간다고나 할까. 언뜻 이처럼 당연한 사실을 여기 적어두는 것이 무의미한 듯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끝내 늙어 죽으리라는 사실, 살다 보면 잊기 좋은 이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 것만으로도, 최영철 시집 금정산을 보냈다는 내 요즘의 생활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까닭이다.

 

총 예순여덟 편의 시에서, 시인의 화자는 아버지였다가(금정산을 보냈다), 연인이었다가(무척산 편지), 친구였다가(못할 짓이 없구나), 오롯한 자신으로(버스는 두 시 반에 떠났다) 돌아오곤 한다. 매 순간 누구와 관계 맺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삶의 역할, 정체성이 시편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시편은 시간의 단위라는 생각이, 시집은 순간의 집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집(詩集)이기 전에, 시집(時集)이라는 생각이,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1연 짜리 산문시인 표제작 금정산을 보냈다는 시의 순간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절절하게 녹아 있다. 화자는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먼 서역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뭘 쥐어 보낼까 궁리하다가금정산을 쥐어주기에 이른다. 당연히, 현실적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행기로 향하는 아들에게 산 하나를 통째로 선물하다니. 하지만 시인의 말마따나 시에서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금정산은 모국과 고향과 부모, 그리고 너 자신(아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금정산의 비유는 아들이 출국장을 빠져나간 순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비의 마음에 가닿게 한다. 독자로 하여금, 시인의 기나긴 생애 중 한 번뿐인 순간에 자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집 금정산을 보냈다는 나에게 타임머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시인이 스쳐온 숱한 삶의 순간을 여행하고,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한때 가슴에 대못을 박은 이를 조문한 기억, 함께 걸어온 당신을 두고 집을 떠나 겪은 그리움의 기억, 밤새도록 문을 두드리는 거센 바람의 기억, 입춘 지나 우수(憂愁)에 젖은 우수(雨水)의 기억,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동료 시인의 기억, 그리고 시골 마을 버스 종점에서 내린 아저씨에게 어딜 갔다 오는지 물었다가 그냥 갔다 왔다는 대답을 들었던 기억까지. 모든 기억은 핀으로 고정해둔 곤충 표본처럼 선명하게, 뿐만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서 숨을 쉬기까지 한다.

 

이는 결국 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늙지 않는 마음의 면들이 아닐까. 아니, 그전에 처음부터 시인의 마음 한 면쯤은 늙지 않았던 게 아닐까.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기준으로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다 보면, 어릴 땐 가슴 설레게 느껴졌던 많은 일들에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삶은 때로 권태로울 법도 한데, 시인의 시를 보면 그런 기색을 조금도 엿볼 수 없다. 되레 모든 시에서 대상을 향한 시인의 순수한 관심, 동심에 가까운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을 따름이다. 이제 나는 나의 삶을, 시인 같지 못했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시인보다 삼십삼 년의 세월을 덜 살았음에도, 나는 최근 들어 얼마나 설레지 않는 나날을 보내왔던가. 해가 다르게 시간의 속력이 빨라지는 듯 느끼는 건, 어느새 내가 너무 많은 것들에 낯이 익어선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를 저버린 채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면 시인은 일 년 일 년을 나보다 무려 서른세 번이나 거듭 살아왔지만 여전히 잘 살아 있잖은가. 이는 내가 아무런 의식 없이 놓쳐버린 시간을 시인은 놓치지 않아왔음을, 손에 꼭 쥐고 기억해왔음을 방증하는 게아닐까.

 

최영철 시집 금정산을 보냈다는 나에게 시간을 놓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 방법을 시간이 흘러도 잊지 않기, 라고 불러도 될까. 삶과 죽음이라는 동전의 양면을, 그 동전에 묻는 수많은 사람의 지문을 기억하기, 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여하간 내가 아닌 다른 것을 통해 나의 순간이나 기억을 반추하는 습관은 나의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더욱 잘 살아 있게 할 것이다. 게다가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마음의 한 면쯤은 늙지 않을지도 모르고.

 

 

 

동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