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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깨우러 오는_김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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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812회 작성일 20-12-07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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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깨우러 오는

 

김석화

 

-125, 토요일-

고단하고 막막한 밤이 시작되었다. 꼬리 자르듯 갑자기 사라졌던 불면이 며칠 전 다시 찾아왔다. 쉽게 잠들지만 한 두 시간 후면 깨어, 밤과 함께 밤을 지새웠다. 눈이 아파서 밤 독서도 하지 못해 눈만 끔뻑이며 베개 아래와 위, 시간의 아래와 위, 방과 꿈 어딘가를 헤매었다. 잠들지 못한 피로가 누적되어 어제 밤에는 반신욕까지 하고 누웠는데 어, 다시 눈이 떠졌다. 큰일이다. 청명한 기운으로 오늘 북토크 하실 선생님을 맞이해야 하는데, 눈은 벌겋고 그늘이 짙다. 그러다 새벽 늦게 잠이 든 모양. 6시쯤 작가님이 보내온 문자 소리를 듣지 못했고 기다리다가 7시쯤 전화를 하셨고 그 소리에 깼다. 이른 아침 멀리서 걸려온 다급한 전화. 미세한 떨림과 고단함, 미안함이 그대로 전해져 나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언가 도움을 전하기엔 너무 멀었고 전화로 어떤 말을 건넬 수도 없어 아, 소리만 몇 번 내뱉은 것 같다. 전화를 끊고 이른 시간이지만 북토크 신청자들에게 취소 문자부터 보냈다. 작가님 책을 좋아하고 뵙기를 기다려온 분들. 그 중에는 나도 있었다. 실은 나의 오랜 바람으로 만든 만남이기도 했다. 여름부터 준비해 추석 지나고 날짜를 잡았으나 당시 책방 사정이 좋지 않고 코로나로 어수선한 상황이라 한 차례 연기했다. 그리고 작가님과 상의해 오늘로 다시 잡은 터였다.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는 시기여서 고민도 했지만 처음 신청자 외에 추가 인원을 더 받지 않고 진행하기로 했다. 나는 엄중한 시기에 먼 거리를 오실 작가님 사정이 걱정되었고, 그 분은 이 행사로 책방에 무리가 있을까 걱정해 주셨다. 서로의 형편과 사정을 살피는 작은 마음이 몇 번 오갔다. 몇 달간 안부를 묻는 시간이 있었기에,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돌진해 오는 상황이 생길 수 있기에, 무엇보다 언젠가 책방에서 만날 수 있음을 예감하기에 오늘의 취소 상황을 담담하게 여긴다. 그러나 머리가 아프고 눈이 아픈 건 사라지지 않는다. 취소 문자를 보내고 다시 누웠지만 나는 잠들지 못한다. 긴급재난 문자가 종일 날아오던 날. 뻑뻑한 눈알을 굴리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누군가의 먼 안부를 묻던 날. 혼자 있었다면 무척 쓸쓸했을 날에 다른 손님은 없었지만 동무들이 와 주었다. 동무의 서울 손님들까지.

 

 

-124, 금요일-

오늘 저 이후로 딱 10권만 팔고 퇴근하세요. 첫 손님의 말. 이웃 책방 사장님이 첫 손님으로 등장해 책 두 권을 사가면서 주문을 건넸다. 누군가 먼저 건네기 시작한 주문. 가끔 우리끼리 인사처럼 건네는 말. 주문을 외워보자. , 그러지요. 오늘 10권 팔아보겠습니다.

지나가다 책방이 있어서 신기해서 들어와 봤어요. 책방이 됩니까? 요즘 세상에 이런 곳에 책방이 있다니 참 신기하네요. 저는 대학에서 공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요즘은 융합이거든요. 공학도 인문학적 이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요즘 학생들 책 안 읽어요. 빌려서도 안 읽어요. 사서는 더욱 안 읽죠. 저도 책을 쓰긴 했지만 요즘 사람들 책 안 사요. 온 김에 제 책 드리고 갈게요. 읽어보세요. 저는 꽤 팔렸습니다. 책 한 권 팔아드려야겠네. 문체 좋은 걸로 하나 추천해 주세요. 이후 두 번째 손님의 말.

저 이제 수능 끝나서 책 많이 읽을 수 있어요. 그래서 책 사러 왔어요. 나중에 친구들 책 선물할 건데 그 때도 여기서 살게요. 문학을 많이 읽던 고3 단골이 수능 보고 와서 한 말.

사장님 저 작년에 뵈었는데 기억하세요? 들어오면서 인사드리려 했는데 책 구경하다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지 몰랐네요. 마지막 손님의 말. 한참을 책을 보기에 신기한 사람이군 생각했다. 그런데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책방 운영자였다. 이렇게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 알았을까. 그녀와 서로 책방 이야기를 나누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주문을 외운 이후 딱 4권을 더 팔았다. 두 번째 손님 말처럼 세상 신기한 일을 하며 신기하고 재미난 사람들을 만난다. 며칠 전엔 더 신기한 일이 있었지. 사람이 드나들지 않고서야 일어나지 않을 일들. 사람이 책방에 와서 책을 사는 것 자체가 희귀한 일이 되다보니 포기와 체념으로 지내다가도 가끔 만나는 신기한 사람들 덕분으로 다시 깨어난다. 긴 겨울잠이 코앞에 닥쳤지만 우리를 깨우러 누군가가 반드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