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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 장09] 끝에 앉아서는2_윤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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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1-26 05:39 조회1,0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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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산지 및 임야는 불법산지관리법 제55조에 의거 경작 행위가 금지된 구역이므로 주민 여러분께서는 일체의 진입 및 경작 행위를 금지하여 주시고 관련 농기구는 수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를 어기고 경작할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

 

  언뜻 녀석의 얼굴에 비치는 당혹감. 그러더니 애꿎은 자물쇠를 만지작거렸다.

  “집에서 잠이나 자련다.”

  돌아서려는데 녀석이 자물쇠를 노려보고 가만히 섰다.

  “내가 풀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더니 자물쇠에 달린 4개의 다이얼 번호를 이리저리 맞추기 시작했다. 0부터 9999까지니 만 개의 경우의 수. 그런데 툭. 녀석이 자물쇠에 귀를 대고 번호를 맞추자 곧바로 자물쇠가 풀렸다.

  금방 녀석이 기고만장해졌다. 청년부 회장 출신과 자물쇠 푸는 실력과는 어떤 상관관계인지 의아했으나,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녀석이 앞장서 옹벽 위로 이어진 길로 향했다. 옹벽 위는 아래에서 본 것과 달리 꽤나 넓었다. 경고문이 무색하게 그곳에 누군가 계속 경작을 해왔는지 괭이나 삽, 비료포대가 군데군데 보였다.

 

  가까이서 본 매화는 그런대로 아름다웠다. 벚꽃보다 앞서 봄을 알리는 꽃. 어디에서 봄이 훌쩍 다가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봄이었다. 그 화사한 매화 아래로 플라스틱 의자가 있었다. 그런데 막상 앉으려고 보니 새카만 물이 고여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옹벽 비탈에 쭈그려 앉았다. 동네가 시원스레 멀리까지 내다보이긴 했다. 그때 녀석이 동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넌 어디로 갈 거냐?”

  이미 동네 아래부터 철거가 시작되어 뼈대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 건물이 많았다.

  그러게, 어디로 가면 좋을까. 다들 어떻게 아파트를 사고 정착해, 차도 사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하는 걸까. 10년 만에 돌아온 동네였지만, 곧장 떠나야 했다.

  그때 옹벽 아래로 트럭 한 대가 지나갔다. 트럭 짐칸에 장롱이나, 책장이 비스듬하게 기울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특히 냉장고가 짐칸 끝에 겨우 매달려있는 모양새였다. 운전자도 그걸 아는지 트럭이 아주 거북이처럼 느리게 나아갔다. 느릿, 느릿, 느릿. 천천히 나아가는데 맞은편에서 오는 차 한 대와 마주쳤다. 도로는 무척이나 좁았고, 트럭이 살포시 각을 트는 순간. 버티고 있던 냉장고가 결국 트럭 짐칸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냉장고는 바닥을 몇 번이나 구르다가, 문짝이 활짝 열렸다. 차 두 대가 마주섰다. 사내가 트럭에서 급히 내려 냉장고를 살폈다.

  “아저씨, 빨리 비켜요!”

  맞은편의 운전자가 창문 밖으로 소리쳤다. 사내는 냉장고의 텅 빈 속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한참을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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