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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생의 독서일기09] 기억의 무게_김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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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312회 작성일 20-11-19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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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생의 독서일기09]

기억의 무게

- 팀 오브라이언,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을 읽고

김재홍

 

 

지미 크로스 중위, 카이오와, 랫 카일리, 테드 라벤더, 팀 오브라이언, 노먼 보커, 헨리 도빈스, 아자, 데이브 젠슨, 미첼 샌더스, 커트 레몬, 리 스트렁크, 바비 조겐슨, 린다, 베트남, 알파 중대. 우리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런 이름들이 있다. 이들 중 몇은, 이름들이 있었다.’라고 표현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앞의 몇 사람의 이름을 건너, 팀 오브라이언(Tim O’Brien, 1946-)이라는 이름이 있다. 그는 아직 살아있다(내가 알기론 그렇다). 그는 우리와 하등 상관없는 이 모든 이름을 직접 적었고, 그들을 우리 앞으로 불러낸다. 그도 그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말한다. “그들은 기억의 무게를 나누어 졌다.(책의 제사)” 기억의 무게. 기억에 무게가 있다면 그건 얼마나 무거워야 적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억에 무게가 있긴 한 걸까? 그런데, 그건 어떻게 측정하는 거지?

 

생각해보면, 기억에는 확실히 무게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 같다. 어떤 기억은 너무 가벼워서 심지어 그것이 현세에 존재했었는지조차 모른다. 반면, 어떤 기억은 우리 의식의 기저에 깊이 가라앉아 있어 도무지 건져 올릴 수가 없다. 이 경우, 기억이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주기 때문에, 기를 쓰고 그것을 덮어버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무거운 기억. 무거운 것이 항상 부정적 용례로 쓰이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에 있어서만큼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무겁다는 것은 고통스럽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오브라이언이 기억의 무게졌다고 적은 것은, 그러므로, 고통이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그러한 느낌으로 전달된다.

소설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 무거운 것들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소설은 시종 그의 내면에 깔린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하고, 길을 헤매고, 되돌아오고, 또 어쩔 수 없이 나아간다. 길 위에 그 자신을 올려놓고 무작정 걸을 수는 없기에, 그는 이야기를 짓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행위는, 길 위에 올라 방향도, 목적도 모른 채 방황하며 나아가는 것과 같다. 모든 기억의 무게를, 그 배낭을 어깨에 짊어지고.

 

오브라이언은 1968년 베트남전쟁에 징용되었고, 1970년까지 보병으로 근무했다. 그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소대와 함께 전쟁을 치러냈다. 그는 소설에서, 소대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내고, 그들에게 목소리를 주고, 그들을 그 시간, 그 장소에 살아있게 만들기 위해 그들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푹푹 찌는 베트남의 농촌과 산골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행군하고, 논에 물을 댄 곳이 석양을 받아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저녁의 정적 속에 잠기기도 하고, 참호를 파고, 다시 행군하고, 전투하고, 죽고, 죽이며 또다시 행군한다. 오브라이언의 기억 속에서, 그의 이야기 속에서, 그와 그들의 동료들은 확실히 살아서 움직인다. 이미 죽었던 사람들 또한, 그들이 죽었던 장소에서 살아 움직이다 죽임을 당한다.

이야기에는 이런 힘이 있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아있게 하고 죽음을 또다시 맞게 하는 힘. 너무나 잔인하고, 가슴 저미는 힘. 그 힘을 가용하는 것은 작가 자신이고, 그는 무거운 기억 위에 덮어 놓았던 더께를 억지로 거두어 내고 그 기억을 들여다봐야만 하는 가혹한 운명에 처한 것도 사실이다. 그가 먼지를 거두어 내고 나면, 고통은 다시 그의 내면에서부터 분명하고 강하게 육박해 온다. 글을 쓰는 사람과, 심지어 읽는 사람은, 직감으로 그러한 것을 알게 된다. 작가가 창조해낸 이야기를 읽으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내면과 정신을 계속해서 톺아보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들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내면과 싸우며 할퀴고 쓸리고 문질러져 으깨진 자리를 만져야만 한다. 일반적으로는, 참거나 시간에 맡기거나, 심리 치료에 도움을 받거나,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표현할 수 없고 드러낼 수 없어 위로받을 수 없는 상처에 대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그러나 작가는 다르다.

소설 속에서, 노먼 보커라는 사람은 바로 그 표현할 수 없고 드러낼 수 없어 짊어지고 다녀야만 하는 상처 때문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작가는, 노먼 보커의 죽음에, 작가 자신의 기억과 상상을 덧붙여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포기해버린 노먼은, “이야기 속으로돌아오고, 비로소 제자리를찾는다(p. 190.). 노먼 보커라는 사람이 당한 고통의 무게에, 그 자신이 묻어두었던 기억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고 길을 나선 작가는, 마침내 그 고통의 무게가 잘 매장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그것을 묻어준다.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작업은 길 잃은 것들에 제자리를 찾아주고, 부를 수 없거나 잊힌 이름들을 다시 불러주는 애도의 작업이다. 감히 짐작해 보건대, 이 길고, 지난하고, 괴로운 애도의 작업을 하는 동안, 죄의식과 우울은 시종 기억을 들춰내며 그를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다. 시지프스처럼, 그는 끊임없이 무거운 기억을 짊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들의 무게를 자기 어깨로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그는 아마 그렇게 나아갔을 것이다.

 

독자는, 작가나 그 장소와 그 시간에 있었던 이들이 짊어진 무게를 절대로 짊어질 수 없다. 책을 읽으며, 그 고통이 온전히 와닿았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한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이 책을 다시 읽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들이 기억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기를, 그들의 이름이 잊히지 않기를 염원하면서.

 

- 팀 오브라이언,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이승학 역, 섬과 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