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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근본주의05] 칠레의 밤_정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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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280회 작성일 20-11-12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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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근본주의05]

칠레의 밤

정진리

 

*<소설 근본주의>는 세상의 모든 현상을 소설로 풀이하는 편협한 코너입니다.

 

 

무사트 기업과 유튜브 채널 피지컬갤러리가 함께 하는 <가짜 사나이>가 최근 독보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MBC 예능 리얼 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의 패러디물로, 꾸며진 연출을 거부하고 날것 이상의 군인 체험을 선사한다. 시청자는 그동안 미화된 병영 이미지에 질렸다는 듯 특수부대 수준의 고된 육체훈련과 과격한 신체 접촉, 가혹행위가 일상인 장면에 환호한다. 몸과 정신이 극한까지 치달은 일반인 출연자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물을 흘리고 개인주의를 반성하는 장면에는 감동적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흥행에 힘입어 교관 중 한 명이었던 예비역 대위 이근은 롯데리아나 <검은 사막> 모바일 게임 등 광고 계약을 맺고 여러 방송에 출연했다. MBC는 과거 이근이 출연한 다큐멘터리를 찾아 다시 유튜브에 올렸다. 이후 터진 이근의 전과기록이나 채무 관계가 이슈가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가짜 사나이>가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를 나타내는 방증이다.

진흙탕에 뒹굴게 하고 물고문에 해당하는 얼차려를 강요한 이러한 프로그램과 교관들에 열광하는 신드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겨레 신문에 실린 임재성 변호사의 칼럼을 필두로 프로그램의 가학성과 고문을 연상케 하는 콘텐츠를 비판하는 기사가 올라와도 우리는 참가자가 자발적으로 신청한 프로그램이며 특수부대의 훈련은 일반 병사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들어 프로그램을 옹호한다. <진짜 사나이>를 비롯한 많은 병영 프로그램이 국민을 기만해왔던 것은 사실이나 어딘가 석연찮은 느낌이 드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저와 같은 형벌의 시대를, 군부독재 시절을 벗어난 지 아직 30년도 안 되지 않았던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은 피노체트 독재정권 시절 비겁한 지식인을 내세운 소설로, 우리가 어떻게 폭력에 둔감해지는지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아옌데를 쿠데타로 몰아낸 피노체트가 공포정치를 이어가는 가운데 마리아 카날레스라는 작가의 별장에 문학예술가들이 모여 파티를 벌인다. 지식인들이 먹고 마시며 문학을 떠드는 동안 이따금씩 전기가 깜빡거리면서 나갔다 들어온다. 지하에서 CIA 요원인 마리아의 남편이 반체제 인사들을 전기로 고문할 때마다 전력이 부족해진 현상이다. 한번은 만취한 극작가가 화장실을 가려다 지하로 내려가 고문 현장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다시 그곳을 빠져 나온다. 칠레의 밤은 독재 정권의 서슬 퍼런 폭력과 탄압과 지식인의 자기합리화를 폭로하는 소설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는 이 소설이 가학성에 열광하는 우리네 사회를 겨냥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위에는 문학 파티, 아래에는 고문. 겉으로는 고상한 말이 가득하지만 실상은 폭력일 뿐인 지금 풍경도 같은 알레고리가 아닐까.

사람을 윽박지르고 무릎 꿇려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시키고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프로그램보다 더 무서운 건 그 속에서 폭력을 발견하지 못하는 우리의 둔감함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