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빨

  • 자료실
  • 글빨

종이봉지공주와 신화_구설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294회 작성일 20-11-10 23:11

본문

종이봉지공주와 신화

 

 

구설희

 

 

 

요즘 중3 아이들과 독서모임을 할 기회가 생겼다. 학생들이 주제를 <신화>로 잡아서 독서모임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중간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신화학자로 유명한 조셉 캠벨의 책을 맨 먼저 접하게 되었다. 그는 전 세계 신화에 나오는 영웅의 공통점을 발견했고 영웅의 여정을 분리-모험-귀환 세단계로 말한다. 덕분에 요즘엔 그림책, 영화, 소설, 동화에 나오는 인물과 신화 속 영웅의 여정이 닮아있음을 느낀다. 사실 영웅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거부감이 들었다. 이 단어는 자칫 한 사람을 신격화하여 영웅이 아닌 다른 사람을 배제할 염려가 있고, ‘국민아버지국민어머니처럼 그 형상을 고정시켜 개인의 다양성을 제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읽고 있는 신화-영웅은 지금의 현실과 어떻게 닿아 있는가도 고민이었다. 하지만 조셈 캠벨은 영웅을 진부하고 특별한 단어가 아니라 현실에서 응용 가능한 단어로 제시해 영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문학이나 영상매체 속 주인공들은 계기가 있어 본래 있던 자리에서 떠나 모험을 하며 귀환하는 과정을 거친다. 영화<스타워즈> 감독 조지 루카스도 조셉 캠벨의 책을 읽고 영감을 받아 영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 <어벤져스> 시리즈나, 그리스로마 신화의 헤라클레스, 그림책<구렁덩덩 새선비>,<내가 기르던 떡붕이>,<개미나라로 간 루카스> 등 셀 수 없는 인물들이 계기가 있어 모험을 하고 시련을 겪으며 한뼘 성장하며 영웅(또는 어떤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세계를 구해내거나 멋지게 귀환하는 등 비슷한 패턴을 하고 있다. 최근에 봤던 그림책 <종이봉지공주>도 그와 비슷하지만 기존 이야기의 문법을 조금 비튼다.

 

<종이봉지공주>의 공주는 동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 종류 공주. 보통 그림책이나 동화의 공주는 수동적이다. 왕자와 행복하게 잘 살았다, 로 끝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종이봉지공주는 좀 다르다. 용이 왕자를 잡아가고 용이 내뿜은 불에 공주 옷이 홀라당 타버렸다. 그래서 종이봉투를 입고 왕자를 구하러 간다. 공주는 똑똑한 꾀로 용을 골탕 먹이고 왕자를 구하는데 왕자는 그런 그녀에게 한마디 한다. 공주가 입고 온 종이봉투를 못마땅해 하며 너 꼴이 엉망이구나(중략)더럽고 찢어진 종이 봉지나 뒤집어쓰고, 진짜 공주처럼 챙겨 입고 다시와라고 말한다. 공주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그래 로널드, 넌 옷도 멋지고, 머리도 단정해. 진짜 왕자 같아. 하지만 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라고 말하며 왕자를 떠나고 둘 다 각자의 길을 간다.

 

여기서 영웅의 정수가 있다. 영웅이란 겉만 번지르르하지 않다. 앞에 언급한 것처럼 조셉 캠벨이 말하는 영웅은 엘리트적이거나 특정한 사람만을 뜻하지 않는다. 영웅의 여정은 어떤 한 사람의 내면의 성장을 상징하기도하고 기존의 규율과 규제를 벗어나 새로운 기준을 자신에게 체현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공주는 그가 말한 영웅에 가깝다. 그 여정에서 그림자이면서 두려움을 상징하는 용과 싸우고 기존 규범이었던 왕자와도 헤어져 새로운 길을 떠난다. 이제 귀환이 남았는데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헤어진 것을 보면 그녀는 익숙한 문법을 따라 살진 않을 것이다.

 

이어 조셉 캠벨은 불교의 불성도 언급한다. 부처의 씨앗이 모두에 있다는 말. 내면의 성장이나 기성 사회에 속박되지 않는 삶 등은 모두에게 영웅이라는 면모가 잠재되어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조셈 캡벨의 말에서 한계 또한 느꼈는데, 사람들이 진정한 자아고유한 본성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 부분이었다. 물론 문맥상 불성을 찾으라는 말을 하기 위해 저 단어를 사용했지만 불교 철학의 무아라는 개념은 진정한 본성이나 자아라고 할만한 게 없음을 말해왔기 때문에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게 없고 변화한다는 건 영웅 또한 우리가 다시 쓰고 만들 수 있는 이미지랄 수 있겠다.

    

1980년대 미국에서 출판된 <종이봉지공주>는 지금의 한국에서 읽어도 전혀 거리감이 없다. 공주라는 이미지는 계속 갱신되는 것이며 영웅이라는 이미지 또한 고정된 게 아니라 변화해 가는 것일 테다. 여기서 영웅의 여정을 눈여겨 볼만 하다. 분리-모험-귀환, 세 단계 중에서 우리는 어디에 머물며 모험하고 있는가? 공주가 입고 있었던 종이봉지는 사실 모험과 새로운 문법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 각자의 용은 무엇이며 종이봉지는 무엇일까. 이런 물음에서 시작하는 게 문학 작품 속 인물들이나 멀게만 느껴지는 신화에 한걸음 다가가는 일이지 않을까.

 

 

 

 

 

구설희

어린이 전문서점에서 일하며 소수자와 동화에 관심이 많다. 에세이집<여름이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