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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 장08] 검은 방1_윤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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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257회 작성일 20-11-05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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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 장08]

검은 방

윤이삭

 

 

  창문에 검은 손도장이 찍혀있다. 좌우로 손짓하며 이리 오라 한다. 창문을 열어보면 대나무가 새파랗게 시치미를 떼고 있다. 진짜 대나무는 아니고, 모조 대나무. 1층에 뿌리박은 대나무는 2층까지 손을 뻗었다. 자리에 다시 돌아와 누우면 대나무는 바람을 맞으며 서럽게 흐느꼈다. 매일 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동네로 돌아온 것은 7년만이었다.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선배들이 꺼려하는 교양 강의를 몇 번 맡았다. 하지만 학과 통폐합과 개정된 강사법의 연이은 펀치로 링 위에서 내려왔다. 아니, 진짜 링 위에 오른 적은 있었나. 줄넘기 훈련을 했던 어렴풋한 기억은 남아있는데. 아무렴 어때. 나는 동네로 돌아온 것이었다.

  7년 동안 동네는 더 낡아있었다. 회백색의 먼지를 뒤집어쓴 느낌. 밤에 산책을 할라치면 곱등이나 바퀴벌레가 걸음마다 스쳐지나갔다. 곱등이가 폴짝 뛰면서 발등을 스친 이후로 산책을 나가는 일은 없었다. 산책 대신 하루에 발을 다섯 번도 넘게 씻는 것이 새로운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한동안 누워있었다. 책장을 들일 자리가 없어 쌓아놓은 책 사이로 몸을 뉘었다. 책은 베개가, 라면 받침대가, 블록이 되어 주방과 거실이 따로 있고 화장실은 두 개인데다 방은 세 개나 되는 아파트를 이루기도 했다. 신축 아파트는 어딘가 허술했다. 외벽을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판형이 똑같은 책으로 교체했다. 마감은 단단히 해야 했다.

  한참 마감 공사를 하고 있는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나가보니 3층에 사는 집주인이었다. 집주인은 문틈 사이로 흘깃 내부를 훔쳐봤다.

  “학생, 계약하자마자 미안한데. 집을 팔게 될 것 같아.”

  학생은 아니었지만 정정하기 귀찮아 묵묵히 들었다.

  “부동산에서 계약서를 다시 써야할 것 같네. 그전까지 청소나특히 곰팡이. 곰팡이 좀 신경 써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서둘러 닫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번 소나기가 쏟아진 이후로 천장에 곰팡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번지더니 어느새 한쪽 벽의 절반을 메웠다. 미리 일러주었다면 대비했을 텐데.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며칠이 지나 부동산에서 집주인과 마주 앉았다. 새로운 집주인은 직접 오지 않고, 계약을 위임받은 법무사가 대신했다. 법무사는 아주 빠른 동작으로 서류에 인감 도장을 나눠 찍었다. 부동산 업자가 계약내용을 확인했다.

  “곧 동네 재개발 들어가서, 언제 방 빼야 할지 모릅니다. 아시죠?”

  내가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했더니 집주인이 목청을 높였다.

  “처음 계약할 때 다 말했잖아. 왜 모르는 척이람?”

  들었던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집에 돌아오니 곰팡이는 한쪽 벽을 넘어 다른 벽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다음날 오후, 밖이 소란스러워 잠에서 깼다. 여기, 저기, 아니, 빨리 하래도. 여러 명의 목소리였는데 이삿짐을 옮기는 모양이었다. 창밖을 보니 골목에 접한 1층에서 짐을 내놓고 있었다. 장롱, 옷장, 이불, 거울, 식기며 온갖 물건을 트럭에 실었다. 동네 주민들도 나와 있었는데 서로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이사를 구경하며 남의 가정사를 훔쳐보나 싶었는데, 집주인이 주민들을 쫓아냈다. 어제 목청을 높이며 발끈하던 모습과 같았다.

  점심을 때우려 찬장을 열었는데 라면이 없었다. 슬리퍼를 끌고 동네 슈퍼로 향했다. 그곳 슈퍼에 딸린 평상에 쫓겨난 주민들이 여전히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랬대? 그랬대. 호들갑을 마구 떨었다. 그러면서 내 얼굴을 보고는 급히 입을 닫았다. 라면을 사는데,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슈퍼를 나서는데 주민이 불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