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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생의 독서일기08] 세속과 신앙, 그리고 예술_김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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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360회 작성일 20-10-29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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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생의 독서일기08] 

세속과 신앙, 그리고 예술

- 이자크 디네센, 바베트의 만찬을 읽고

김재홍

 

 

 

이자크 디네센(Isak Dinesen, 1885-1962)1958년에 발표한 바베트의 만찬Babette’s Feast은 신앙의 경건함과 예술에 관한 작가의 세계관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 산골 마을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매와 그들을 찾아온 한 프랑스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동화적으로 서술하는 소설은, 마법 같은 환상의 순간에 내재한 감동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일견 놀라운 것은 그것이 단지 하나의 올곧은 세계만을 위한 감동이 아니라, 한 세계와 다른 세계가 만나 아름다운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감동을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두 자매와 그들의 삶으로 대비되는 신앙의 영역과, 자매와 연관된 두 남자로 대비되는 바깥의 영역, 즉 세속의 영역이 바베트라는 예술가를 통해 조화를 이루어낸다.

 

노르웨이의 어느 깊은 산기슭에 자리한 베를레보그라는 작은 마을. 그곳에서 교파를 일군 목사의 두 딸인 마르티네, 필리파 자매는 오래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만든 독실한 교파의 늙고 쇠락한 신도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경건하게 살아간다. 자매의 근심 중 하나는, 목사가 떠난 뒤 이 청교도 마을 신도들 사이 서로를 향한 불신과 감정의 골이 조금씩 깊어져 온 것이다. 자매를 비롯한 모두가, 마을에 감도는 불화를 조금씩 짊어지고, 각자 나름의 고립감과 함께 살아간다.

어느 날, 젊은 시절 필리파에게 깊이 빠져들었던 아실 파팽이라는 유명한 가수의 편지와 함께 바베트가 자매의 집으로 찾아온다. 바베트는 프랑스의 격정적인 내란에 휘말려 가족을 잃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 아실 파팽의 도움으로 자매에게 어렵사리 당도한다. 자매는 바베트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지만, 생활 방식과 문화도, 심지어는 신앙관도 다르고, 한 사람을 더 먹여 살릴 형편도 넉넉하지 않아 걱정스러운 마음을 품는다. 우려와는 달리, 바베트는 놀라운 솜씨로 자매의 집에 찾아오는 마을 사람들을 살찌우고 자매의 삶에 안정감을 더한다. 바베트는 자매가 살아온 고요하고 경건한 삶과 하나가 된다.

세월이 흘러, 오래전 세상을 떠난 자매의 아버지의 100번째 생일이 다가오고, 자매는 생일을 기념하는 작은 행사를 열기로 한다. 그녀들은 성도들이 목사를 기리며 갈등과 불화를 딛고 화해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런 자매에게 바베트는 목사의 생일 만찬을 준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자신이 아는 프랑스 요리로 성도들을 대접할 수 있게 해달라 간청한다. 자매의 집에서 살아가는 동안, 바베트가 그들에게 어떠한 부탁도 한 적이 없었기에, 자매는 바베트의 간곡한 청원을 당황해하면서도 들어줄 수밖에 없다. 동시에, 그들의 마음 한편에는 바베트가 이 만찬에 기괴함과 요란함을 더할지도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이 자리한다.

두 자매와 나이 많은 성도들, 그리고 한때 마르티네의 연인이었던 로벤히엘름 장군과 그의 고모 로벤히엘름 부인. 모두 열두 명이 바베트의 만찬에, 먹고 마심의 자리에 초대되어 둘러앉는다.

 

이 길지 않은 이야기는 여러 상징과 비유를 통해 인생과 운명, 사랑에 관한, 그 모든 것들에 눈처럼 내리는 은총과 죄 사함과 축복에 관한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두 자매는 신앙적 경건함을 위해 기꺼이 이 땅의 쾌락과 정욕을 인내하며 하나님을 위해 인생을 바친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 청빈한 삶과 신앙의 공동체는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몸처럼 쇠락하여져 간다. 성도들 사이에 자라난 미움과 시기, 질투는 경건함이 더 이상 그들 사이 공통의 감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버거운 의무와 강요가 되어버린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들은 다시 무거운 짐 진 자들, 멍에를 멘 불행한 자들로 돌아간다.

만찬의 자리에 초대된 다른 한 사람, 마르티네의 연인 로벤히엘름은 신앙 바깥의 영역, 즉 세속의 영역에서 자랑스러운 영광을 누리지만 마음 한구석에 고향을 향한, 젊었을 때의 순수한 열정을 향한 그리움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는 젊은 시절 마르티네를 떠난 뒤 추구해온 용감하고 도덕적인 삶, 신의와 충직으로 가득 찬 삶을 통해 모두의 인정을 누렸지만, 자신의 삶이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든 그는 영혼에 대해 생각한다. 그가 영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의 영혼이 굶주리고 지쳐 있음을 말해준다. 그는 의심을 품으며, 젊은 시절의 자신을 정리하기 위해 마르티네에게로 돌아간다. 우연처럼, 그는 만찬의 열두 번째 자리에 초대된다.

 

마르티네와 필리파, 그리고 로벤히엘름. 신앙과 세속이 바베트라는 요리사, 예술가의 식탁으로 초대되어 함께 먹고 마신다. 그들이 먹고 마실 때, “자비와 진리가 하나되고, “정의와 축복이 입맞춤한다(p.65.). 육신의 무거운 멍에와 짐을 내려놓고, 영혼이 쉼을 얻는다. “시간은 영원 속으로(p.67.)녹아든다. 추운 겨울밤, 그들이 먹고 마시는 공간과 그들을 둘러싼 온 세계에 은총이 눈이 되어 내린다.

 

바베트는 말한다. “저는 위대한 예술가예요!”(p.74)

 

 

이자크 디네센, 바베트의 만찬, 추미옥 역, 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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