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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영화의 관객들07] 바다보다 더 깊은,_변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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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5 14:02 조회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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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영화의 관객들07] 

바다보다 더 깊은,

변혜경

 

  

온라인 수업 운영기간이 지나가고 추석 즈음부터 관객문화교실 수업을 대면수업으로 조심스럽게 바꾸어갔다. 오랜만에 모퉁이극장에서 만나 처음 본 영화가 <태풍이 지나가고>이다. 마침 마이삭, 하이선 등 강력한 태풍들이 지나가고 난 뒤라 제목이 크게 다가왔고, 영화에 대해 얘기 나누고 싶어 이 영화를 선정하게 되었다.

 

노모 키키 키린을 통해 한 세대의 마감 이후 우리에게 놓여질 자리가 어떠할지 생각해보고, 어머니, 아들, 남매, 손자 등 가족의 구성원들에 대해 느낀 감정을 나누기도 했지만 여전히 많은 이야기가 오고간 인물은 아베 히로시가 열연한 중년남성 료타였다. 그는 청운의 시절 소설을 써서 문학상을 받아 이름을 알렸지만 이후 변변한 작품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한 채 경마로 인생역전을 꿈꾸는 한심한 어른이다. 흥신소에서 일하는 걸 소설 쓰기 위한 취재라고 자위하며 이혼한 아내와 애인의 뒤를 쫓거나 의뢰인 가정의 치부를 찾아내 돈을 뜯어내고 여차하면 본가에 가서 전당포에 맡길 물건을 몰래 훔쳐가기 바쁜 철없는 어른, 무능한 가장인 것이다.

 

료타를 볼 때면 실화 바탕의 영화 Can you ever forgive me?(2018)에 나오는 여주인공 리 이스라엘이 떠오른다. 그녀 역시 한창시절 딱 한 번 기적같이 베스트셀러 100위 안에 올랐던 과거 시절만 되새김질하며 뉴욕 뒷골목에서 재기를 꿈꾸며 살아가는 어쭙잖은 중년의 여성이다. 방세도 밥값도 없는 상태로 전락한 절망적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망한 유명작가가 남긴 편지를 진품보다 더 진품같이 위조해 팔아가며 연명해간다.

 

이런 주인공들을 보며 혀를 차다가도 영화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님에 고개가 숙여진다. 아들 싱고는 아빠 료타에게 묻는다: “아빠는 뭐가 되고 싶었어? 되고 싶은 사람이 됐어?”라고. 중년이 되고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이 질문에 흔쾌히 그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이가 들면 많은 것들을 내 손으로 쥐락펴락하며 살 것이라던 청년의 기대는 헛된 꿈이었음을 알게 될 뿐, 현실과 꿈의 어긋남 사이,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채색된 틀에 박힌 일상 안에서 겨우겨우 살아낸다.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건 료타의 가족들이 료타를 바라보는 마음이다. 그 정도면 불만과 분노, 증오가 나올 법하지만 료타 주위엔 안타까운 감정들로 무성하다. 속물이지만 한심한 동생과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고 도움을 주는 누나, 무능한 남편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함께 있어주는 아내, 아빠가 실수하지 않고 잘 되기를 바라는 아들, 집에 들를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편하게 대하고 언젠가 쓸 소설에 대사로 쓰라며 메모를 독촉하는 엄마, 집문서를 가져가도 아랑곳하지 않을 것 같은 가족들의 모습, 여기에 고독사로 인생을 매듭짓는 노년 세대의 슬픔과, 가족의 해체와 몰락의 상처를 품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청년세대들이 배경으로 깔리면서 감독이 가진 세상과 존재에 대한 깊은 근심을 만난다.

 

좀더 나은 삶을 꿈꾸고 행복을 바라지만 언제나 뒤처지는 현실, 마음에 들지 않는 투성이고 희망이 산산조각 날 때도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관객문화교실을 시작한 불과 5년 전과 비교해도 너무나 달라져버린 나의 모습, 20대 시절과 비교하며 곱씹기 바쁜 시간들이 늘어나면서 이런 질문들이 현실적 고민이 되어버린 즈음, 태풍이 지나가고는 일상에 작은 위로와 지혜를 건네준다. 삶의 끝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는 듯 키키 키린이 바다보다도 더 깊은이라는 노래를 들려주며 요즘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며 할머니의 마음결을 알아차릴 리 만무한 어린 손주에게 무심히 탄식을 늘어놓지만 아들 료타에겐 누군가를 바다보다도 더 깊이 사랑한 적이 없어서 살아갈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우리의 구원은 신이나 완벽한 인간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에 내던져진 고독한 존재자임을 망각한 채 허망한 꿈과 생각들로 나를 채우며 살아가다 한계에 봉착할 때, 부족하지만 곁에 있는 이웃과 친구와 가족, ‘라는 공허의 주변에 지키고 서서 관계라는 실체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친밀한 타인들이 나를 일깨운다. 리 이스라엘 옆에도 그녀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주는 친구 잭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깊음은 바다보다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신과 같은 능력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무지해도 무상한 시간 속에서도 관계의 실타래를 소중히 여기며 함께 살아낸 연민과 염려라는 마음의 깊이와 역사가 아닐까. 나이 들며 행동은 굼뜨고 생각의 날들도 무뎌지지만 마음은 차츰 물러지고 눈물만큼 안쓰러움이 많아지는 것, 그렇게 관계도 걱정처럼 깊어지는 것,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발견한 삶의 작은 이치 한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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