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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세계)와 소년(의 세계): <로드>(2006)_정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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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342회 작성일 20-08-14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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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세계)와 소년(의 세계): <로드>(2006)

 

 

정희연

 

 

  국내에선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단 코엔·조엘 코엔, 2007)나 <카운슬러>(리들리 스콧, 2013)의 원작자로 더 익숙할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 1933~)가 그의 아들 존(John Francis McCarthy)에게 헌정한 10번째 소설 <로드>(The Road, 2006)는 재앙이 닥친 후 생존을 위해 힘겨운 발걸음을 이어나가는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작품 역시 비고 모텐슨 주연의 <더 로드>(존 힐코드, 2009)로 일찌감치 영화화되었다. 포스트-아포칼립스적 세계를 그린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이름이 없는 남자와 소년은 재앙 이후의 잿빛 세상을 걷고 있다. 재앙 역시 그 이름과 발생 이유가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 “시계들이 1:17에 멈추었다. 크고 긴 가위 같은 빛에 이어 낮은 진동”(62)1)이 있었다는 사실만이 제시되는 전부다. 길 위에서 그들은 존재 자체로 위협인 식인을 일삼는 인간들과 끊임없이 추위를 선사하는 자연을 만난다.

  2007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로드>는 2000년대 이후 더욱 쏟아지는 북미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의 본격적인 신호탄이면서, 재난 이전-이후의 세계를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양분된 세계 구조로 읽어나가는 데 손색이 없어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이라는 장르에 으레 기대하는 면면들을 찬찬히 뜯어보기에 용이하다. 잿빛 배경, 신의 유무, 정착지가 없는 여정, 폐기된 정체성, 자본주의(의 죽음), 선과 악의 양분, 새 시대의 가족, 한 줄기 희망의 형태 등. 서사를 이루는 제재들은 구분되지 않는 장(章), 따옴표나 아포스트로피(apostrophe) 등의 문장부호 생략, 특정할 수 없는 화자 등 건조하고 간결한 매카시의 문체와 어우러져 부자의 기약 없는 길 위에서의 난파된 삶을 그리는 데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로드>에서 특징적인 것은 남자(아버지)가 꾸는 꿈과 소년(아들)이 꾸는 꿈이 다르다는 점이다. “인간의 사랑, 새의 노래, 태양으로 이루어진 부드럽게 채색된 세계”(308)를 그리는 남자의 꿈과 대조되게 소년의 꿈은 이 광야에서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죽음에 가까워진 남자가 소년에게 꿈이나 말하지 않은 생각에 대해 물을 때 소년은 그것들이 “우리가 사는 거와 비슷”(303)하다고 대답한다. 

 

남자는 소년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사는 게 아주 안 좋니?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나는 우리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우린 아직 여기 있잖아.

그래요.

넌 그게 별로 대단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구나.

괜찮죠, 뭐. (303)

 

‘여기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 소년으로부터, 남자의 세계와 소년의 세계가 양분된다. 남자의 세계가 재앙 이전의 세계와 삶이라면, 소년의 세계는 재앙 이후의 세계와 삶이다. 남자와 아들이 체감하는 이 여정과 세계는 신체적·물리적으로는 어린 아들에게 더욱 혹독할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나이든 아버지에게 더욱 혹독할 수도 있다. 재앙 이전에 태어났고 안온하던 유년시절을 기억하는 남자는 이 절망적인 시대에서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이 기적이면서 동시에 고통일 수 있지만, 재앙 이후에 태어났고 태어나서부터 경험한 것이라고는 이렇게 아버지와 잿빛 세계를 걷는 것이 전부인 아들에게 어제와 다르지 않은 매일은 기적도 고통도 아니다. 아들에게 “우리가 아직 여기 있다는” 건 그냥 ‘여기’ ‘있는’ 사실이자 일상이다.

  걷는 것을 계속해서 힘들어하는 소년이 눈이 밀려온 들판에서 쓰러져 떨고 있을 때 남자는 소년을 안고서 “미안하다. 미안해”(114)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이 재앙적인 세계에 태어나게 했고 걷게 ‘한’ 아버지의 ‘자기’ 아들에 대한 애처로운 감정으로만 이해하기보다, 이 절망적인 세계를 물려준 남자와 남자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아버지들 세대’의 자조 섞인 후회와 미안함으로 확대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시계들이 1:17에 멈추었다. 크고 긴 가위 같은 빛에 이어 낮은 진동”이라는 재앙에 대한 설명은 핵폭발을 떠올리게 한다. 남자는 남자가 스스로 의도하지 않으면서 파괴하고 있었을지 모르는 세계를 소년에게 남겨주고 걷게 한 것이다. 남자의 돌아갈 수 없고, 돌려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절망적인 탄식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독자들이 소년을 보며 느끼는 슬픔, 아픔, 안타까움 그리고 미안함과 동시에 공명한다.

 

  “질문: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40) 남자가 잿빛 세상 속에서 되뇌는 이 질문은 매카시가 현대의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로드>의 세계와 영영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 있을까? 출간 이후 13여 년이 흘렀고, 이제 우리가 이 질문에 당면해 있다. 문득 마스크를 쓰고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아이들도 작품 속 소년처럼 마스크 착용에 대해 “괜찮죠, 뭐”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로드>의 결말과 함께 이 글도 마무리해야겠다. 매카시는 작품의 가장 마지막에 알쏭달쏭한 한 문단을 남긴다. 간단하게는 “송어”와 “생성되어가는 세계의 지도”와 “되돌릴 수 없는 것”에 관한 것이다. 여태까지와 사뭇 결이 다른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암시다. 대체 무슨 의미일까? 더운 여름, 서늘한 분위기의 <로드>를 읽으며 각자 찾아보시길 바란다.

 

1) 작품에 대한 인용은 코맥 매카시, <로드>(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08)를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