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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文魚)_임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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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2,119회 작성일 17-07-14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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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7.07.14 초단편소설

문어(文魚)

임기현

 

 

우렁찬 금관악기 소리가 어두운 생활관에 불쑥 찾아오면, 무쇠로봇 같은 우리의 젊은이들은 꺼진 알전구 같은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나네, 잘 짜인 프로그램이 입력된 공장의 기계처럼, 척척 모포와 침낭을 각 잡아 개키고는 티브이를 틀어 최신 유행하는 가요를 송신하는 케이블 방송국의 채널에 맞추네, 생활관에 있지도 않은 머리긴 여자 아이들의 목소리가 신나는 리듬과 함께 울려 퍼지고, 젊은이들은 등을 돌려 엇박자로 황급히 환복을 하네, 일어선 모두가 냉장고 같은 관물대를 마주하고는 똑같은 옷에서 똑같은 옷으로, 순식간에 이끼 같은 녹색으로 둔갑한다네, 가장 먼저 환복을 마친 사내는 아직도 누워있는, 침낭 밖으로 둥근 까까머리만 내민 채 누운 귀를 찾아가네, 그 문어 같은 머리에 빨판처럼 달린 귓구멍에다 작은 소리로 기상시간입니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하네, 여자아이들의 목소리는 절정으로 치닫고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 생활관의 안과 밖, 복도에서는 황급히 움직이는 군화소리들이 따닥따닥 울리고, 그제야 문어들은 스르륵, 꿈틀거리며 일어나네, 돌돌돌 침낭과 모포는 연체동물처럼 쉽게 말리고, 미끌거리는 양서류 무리처럼 초록의 사내들이 연병장으로 몰려 나가네, 황무지에 흙먼지가 일고, 단상에는 다랑어처럼 배가 툭 튀어나온 사내가 견장을 차고 서 있네, 편의점의 우유들처럼, 오와 열을 맞춰선 초록의 사내들은 순서대로 사내를 보며 근무교대 정산 같은 보고를 마치네, 영수증 같은 보고판에 적힌 숫자와 단상 아래의 수류탄 같은 둥근 머리들, 사내들은 열을 맞춰 연병장을 돌기 시작하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진 초록색의 두 줄은 어떤 생명체의 촉수처럼 보이기도 하네, 이 강산은 내가 지키노라, 당신의 그 충정, 음향기계의 사운드 그래프처럼, 늘어선 열의 앞과 뒤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크기가 맞지 않고, 뒤에서 흐느적거리는 문어들은 잘린 연체동물의 다리처럼, 흐물거리는 발음으로 노래를 흘리네, 하늘 보며 힘껏 흔들었던, 평화의 깃발, 문어처럼 생긴 탱크를, 갯벌의 구멍 같은 포진지를, 플라스틱 방탄헬멧을 쓴 근무자들을 스쳐가는 동안, 움직이는 발에 맞춰 일정한 박자로 나오는 노래들, 묵직한 군화는 노래가 나오는 요술 신발이라도 된 것 같네, 아아 다시 선 이 땅에, 당신 닮은 푸른 소나무, 막사 뒤로 보이는 산에는 같은 색깔의 소나무가 많고, 그 무리는 몸집이 거대한 짐승처럼 보이기도 하네, 이 목숨 바쳐 큰 나라 위해, 끝까지 싸우리라, 짤랑거리는 군번줄은 바닷가의 소금기처럼 조그맣게 반짝거리네,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인 듯이 숨을 헐떡이는 사내들, 견장을 찬 사내는 두발단속강화를 전달하고는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가고, 또 다시 달려가는 앞줄의 사내들, 짤랑이는 군번줄이 컴컴한 주머니 속 동전 같은 소리를 내네, 사내들이 생활관에서 식판을 챙겨 내려오는 동안, 문어들은 흡연장으로 가 가슴팍에서 담배를 꺼내 뻐끔거리네, 가슴에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인 계급장은 담배와 닮았지, 식판을 챙겨온 사내들이 다시 오와 열을 맞춰 서는 동안 문어들은 웃으며 담배를 끄네, 옆구리에 낀 식판 아래로 쥔 주먹들이 연체동물의 대가리 같네, 글자를 모르는 문어들은 오늘 아침의 식단을 물어보고, 사내들이 입을 모아 먹게 될 반찬들을 큰 소리로 외치네, 지난밤 대대장이 시행한 마음의 편지에는 어떤 글자도 적히지 않았네, 식료품 코너에 조용히 누운 두부들처럼, 하얀 백지들을 거둔 문어는 흡족하게 중대장에게 그걸 전달했지, 하룻밤 사이에도 문어들의 민둥머리는 조금씩 자라고, 이윽고 가장 머리가 많이 자란 문어가 앞장서서 걷자 꽉 쥔 주먹들이 발을 맞춰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처럼 따라가네, 아주 건강한 치아처럼 고른 모습으로, 오늘 아침을 소화하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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