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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자연적인가 (6)_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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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977회 작성일 19-12-3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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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주의 도그마 完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한 이후 현대철학에서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비판적 계승, 해체, 거부, 변이하는 것이 소위 주류적 작업방식이 되었다. 후설은 ‘사태 그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라는 유명한 문구로 더 이상 현상(phenomenon)과 본체(noumenon)의 관계에서 본체를 원형으로 잡고 현상을 위계적으로 하등하고 불완전한 존재자에 배치하는 철학은 성립 할 수 없음을 선언했다. 후설(시기 마다 상이하지만)도 당대의 심리주의에 반대해 인식의 토대가 되는 데카르트적 자아 쪽으로 무게추가 기우는 듯하지만, 사태 그 자체(일종의 無極)가 아닌 이분법적 프레임들은 예전처럼 명석-판명한 개념이 아니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영미권 철학에서는 형이상학에 대한 반동으로 여러 철학 모델들이 제시 되었다.(하지만 이것도 일관된 흐름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논리 실증주의와 철학적 행동주의(behaviorism)는 비트겐슈타인의 문제의식과 비슷하게 철학의 문제들은 언어의 문제이므로 존재론(ontology)이 아닌 의미론(semantics)으로 철학을 대체하려는 성향을 보였다. 하지만 실증주의 논사들의 ‘번역 프로젝트’(심적 상태에 대한 기술들이 물리학적 용어들로 완전 번역이 가능하다는 발상)나 철학적 행동주의의 ‘보는 지점이 없는 곳에서의’ 관찰 가능성에 의존한 존재 양식은 메를로 퐁티가 비판하는 ‘즉자적 개념’1)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분석철학에서도 실증주의, 행동주의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이 개념들은 현대의 ‘과학적 형이상학’의 사상적 자양분이 된다.

 

환원적 물리주의와 비환원적 물리주의

   무엇이 물리적인가? 물리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과학이란 무엇이며 과학적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로스, 킨케이드 등은 <In Defence of Scientism>(2007)에서 현대 환원적 물리주의(Reductive Physicalism)의 대표자라고 볼 수 있는 김재권, D. 암스트롱 등의 이론은 현대 과학의 성과와 무관하게 사변적이고 임의적으로 정의한 그들만의 ‘과학’에 의존하기 때문에 사이비-과학적 형이상학이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그들은 현대 과학에 비추어 인간의 탐구 능력 범위를 벗어난다고 간주되는 이론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주류 과학의 지식 체계에 비추어 보아, 원리적으로 검증 가능한 가설들에 대해서만 형이상학이 존재론을 제공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이 때 과학철학의 유구하게 케케묵고 중요한 화두를 던지자면, 모든 과학들(생태학, 분자생물학, 무기화학, 지질학, 바이러스학, 천문학 등)의 보편성을 추출 해낸 ‘하나의 과학’이란 존재 할 수 있나?(생물철학자 E. 마이어나 D. 헐은 보편자에 반대할 것이다.) 과학적 지식은 가치중립적인가? 형이상학이 과학과 교집합을 이룰 수 있지만 어느 한쪽이 존재론적으로 종속되어야 하나? 형이상학과 과학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나? 나눌 수 있다면 그 맥락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맥락은 얼마나 탁월한가?

   무엇이 물리적인 것인지, 물리적인 것이 아닌지 구분하는 기준을 세우는 일은 생각보다 자명하지 않다. 환원적이든 비환원적이든 물리주의적 세계관을 꾸리고 있는 학자들은 ‘물리적 속성’이라는 공리를 암묵적으로 승인 하지만 구획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이상 물리주의는 출발 자체가 불가능하다. 브랜든-미첼과 잭슨(1996)은 물리적인 것을 ‘물리학, 생물학에서 도입한 개체, 속성, 관계들’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여기서 과학은 정태적인가 유동적인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뉴턴 시대의 물리학이라는 프로그램이 실행될 때 사용하던 방법론과 존재론적 요소들은 당연히 현대 물리학에서 다루는 방법론, 시공간론과 상이하다. 생물학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의존적인 체계에서 한 단면만 분리해내어서 그 분리된 부분만으로 철학적 문제들을 환원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자신의 출처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모든 분과 과학들과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통틀어 관통하는 하나의 과학은 없거나, 있는 지 없는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물음도 가능하다. ‘물리적인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물리학에서 사용하거나 발견된 존재자들’이라고 답하는 것은 순환논법이 아닌가? 가령, 이런 방식으로 물리적 속성을 정의할 경우 집에서 북쪽으로 1km 떨어진 마트에 가서 소고기 1kg을 사서 돌아온 후 160℃로 가열한 후라이팬에 고기를 구울 경우, 이때는 물리적 기술을 한 것인가? 일상적 기술을 한 것인가? 분과학문에 의해서 분과학문의 존재론적 요소들의 외연을 결정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배타적 소유는 불가능하다. 역으로 생각하면 물리적 단위들도 경험적 서술들에 의존해서 제작된다.

   환원적 물리주의에 의하면 비물리적인 것들(정신의 자율성, 감각질, 감각, 지향성) 또한 물리주의의 용어로 번역 가능해야 한다. 성공적인 환원을 위해서 물리주의자들은 E. 네이글이 제시했던 ‘교량법칙적 환원’ 전략을 구사한다. 과학들 간에 궁극적인 것과 근접적인 것의 위계를 나누어서 더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분과에 덜 기초적인 분과를 환원시키는 방식이다. 환원의 표적이 되는 이론 법칙들(ex: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미학)을 토대 이론(ex:물리학)의 법칙들로부터 논리적, 수학적으로 도출하는 과정으로 간주된다. 서로 이질적인 어휘체계를 가진 학문들을 연결 시키기 위해서는 교량법칙이 필요하다. 생물학을 물리학에 환원 시키고자 할 때 생물학의 언어(L)는 토대이론의 정의방식을 써서 L’으로 번역 할 수 있다. L’을 토대이론의 법칙들로부터 도출 가능하다면 두 이론은 충분히 하나로 환원된다. L’을 토대이론의 법칙들로부터 도출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L’을 토대 이론의 추가적인 법칙으로 간주하면 문제 되지 않는다.

   하지만 물리주의자들은 교량 법칙적 환원이 비물리적인 심신이론들과 양립 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심물간의 동일성 환원’ 전략으로 선회했지만 퍼트넘의 복수실현가능성 논제(가령, 생물종 마다 ‘통증’의 물리적 상태는 다른데 모두 통증이라는 입-출력 반응양식을 갖추고 있는 것.)에 격파 당하고 다른 환원 모델을 찾게된다. 그리고 최근 각광 받고 있는 것이 ‘기능적 환원’ 모델이다. 기능적 환원에서는 심적 상태가 정의항과 피정의항으로 서술된다. 가령 ‘통증’이란 ‘세포 조직의 손상에 의해 움츠림, 신음, 등을 유발하는 상태’라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때 ‘통증’이란 무엇일까? 가령 우리는 PTSD 환자나 환지통 환자의 통증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 어떤 세포단위의 ‘조직 손상’을 발견 할 수 없다. 함수관계로는 이 환자의 통증을 정의 할 수 없다. 환지통 환자들이 항상 통증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다. 즉 동일 뇌신경 상태에 처해 있는데 왜 두가지 반응 양식이 존재 할 수 있나? 또한 행동주의가 행동으로 심적 상태를 환원 시키려 한 것과 같이 인간의 마음을 입출력으로 보려 할 때 개인에게 고유한 ‘감각질(노을의 붉음에 대한 느낌, 이불의 푹신함)’의 문제가 발생 한다. 만약 기능적 환원주의가 감각질에 대한 설명을 포기한다면 ‘심리이론’으로서 가치가 있는 지 의문이다.

 

 

 자연은 자연적인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자연이 자연적이지 않다고 해서 자연주의가 폐기 되어야 하는 세계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도들은 필요하지만 세계에 대한 ‘통일장 이론’으로 작동하면 맹목적인 이데올로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경계해야 한다.

 

1) 퐁티가 보기에 이원론, 물리주의, 관념론 등은 ‘객관적 사유’를 가정하고 있다. 객관적 사유란 그 모습이 어떠하던 간에 원리상 불투명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완성된’ 세계 또는 ‘환정된’ 세계로서의 즉자적 세계를 주장한다. 그것은 사실(현상)에 밀착하기보다는 ‘거리두기’의 사유이다. / 주성호(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