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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레이니데이_정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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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11-14 15:35 조회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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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레이니데이 

정재운

 

 

1. 안다, 기억이 시작될 무렵부터

구금비 씨가 바깥의 궂은 일기를 알아차린 것은 그녀의 딸, 신은비 양이 길쯤한 배추 잎사귀를 찢어내고 있을 때였다. 은비는 오른손에 쥔 포크수저로 고춧가루가 듬성하게 묻은 김치를 찍어 이리저리 비틀어댔다. 배식 아주머니는 다른 친구들에겐 모두 잘게 잘린 김치를 주면서 왜 자기한테만 나부대대한 걸 얹었는지, 은비는 모르지 않았다. 엄마 금비 씨는 은비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사실, 은비가 알아차린 건 꽤 오래 전이었다. 누군가 은비에게 언제부터 알아차리고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은비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기억이 시작될 무렵부터?”

 

2. 상대가 김치이기 때문

은비가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기억이 시작될, 그 어린 시절부터 은비는 어린이집에 다녔고,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 차별을,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그러나 금비 씨는 모른다. 은비가 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녀에게 은비는 여전히 그늘 없는 아이여야 했고, 그 그늘을 걷어내기 위해 자신이 돈을 벌어야한다는 사실을, 금비 씨는 새기고 또 되새겼다. 은비가 손가락을 쓰지 않고도 김치를 잘게 자르는 데에 성공했다. 은비는 다른 친구들이 곧잘 천대하는 김치를 남기는 법이 없었다. 그것도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먹듯이 꿀꺽 삼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반찬보다 꼭꼭 씹었다. 꼭꼭 씹다보면 어떤 음식이든 그 고유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엄마가 그랬다. 은비가 또래보다 유독 엄마 말을 잘 듣는 아이라거나, 착한 아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상대가 김치이기 때문이었다.

 

3. 사십 살이 다 돼도 모르는 것을

그렇다면 은비는 김치만의 고유한 맛을 알게 되었는가, 하면 그것까진 잘 모르겠다. 과연, 여덟 살짜리가, 적어도 삼사학년은 되어야 알까말까 한, 아니다. 사학년이라고 뭘 알겠는가. 사십 살이 다 돼가는 금비 씨조차 모르는 것을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실은 금비 씨는 김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할 턱이 있나. 공장에서 매일 같이 치대고 담그는 것이 바로 저 김치인 것을. 그런데도 왜 금비 씨는 은비에게 꼭꼭 씹으면 고유한 맛이 난다고 말해왔던가. 그 이유까진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은비가 먹기 싫은 김치를 꼭꼭 씹듯이, 금비 씨도 되새기기 싫은 어떤 것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딸내미 손에 우산 하나 쥐어줄 정신도 없이 일터로 향했던 발자국에는 그날 하루치의 되새김질된 다짐이 뚝뚝 묻어있었다.

 

4. 꼭꼭 씹느라 턱이 바쁘다

은비는 김치처럼 다른 음식도 꼭꼭 씹어 먹는 편이었다. 그래서 일학년 사반의 점심시간엔 은비 주변만 조용했다. 은비는 그게 다 자신의 꼭꼭 씹는 습관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내 턱은 너무 바빠서 말할 새가 없지.’ 그러나 점심시간이 끝나고 수업시간에도 은비에게 장난을 걸거나 속닥속닥 귓속말을 하는 친구는 없었다. 쉬는 시간에도, 체육시간에도 은비는 침묵에 에워싸여 있었다. 은비는 가끔 생각했다. ‘점심시간이 아닐 때에도 다들 꼭꼭 씹기 바쁜 턱을 가졌으면금비 씨는 그렇게 꼭꼭 씹고 되새기다보면 영양소가 고루 쌓일 거라고 했다. 그녀도 그렇게 되새기는 노동의 가치, 의미가 새록새록 쌓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다. 그러나 갈수록 그녀가 실감케 되는 것은 돈의 가치, 위력뿐이었다. 그녀는 한때, 좋은 세상 만들기에 청춘을 바쳤다. 구금비 씨가 바깥의 궂은 일기를 알아차린 것은 그녀의 왼뺨으로 한 방울의 비가 긋고 지났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턱이 절로 위로 들렸다. 컴컴한 색의 구름이 덩치를 부풀리고 있었다. 하늘은 금세 먹빛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금비 씨는 중얼거렸다. ‘원래 하늘이 무슨 색이었지?’ 푸르렀던 모습이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5. 청춘이 기억하는 언어들

금비 씨는 벌건 것들로 채워진 식판을 내려 보며 문득, ‘비정규직 철폐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김치지짐이를 찢어서 입에 넣을 땐 외국인노동자 인권이라는 말이 지나갔고, 김치찌개를 뜰 때는 총파업이라는 말이 앵앵거렸다. 지금이야 어디 먼 나라의 언어처럼 들리지만, 그것들 모두 실은 금비 씨의 청춘이 기억하는 언어들이었다. 금비 씨는 다 잊어버렸다지만, 그 시절이 어디 투쟁의 언어로만 빼곡했으랴. 카심 토카레프와 나누었던 그 무언의 수다는 사랑의 언어가 아니었던가. 그것이 일상의 언어로 옮아가기도 전에 그는 금비, 은비의 곁을 떠났다.

 

6. 금비에게만은 언제나 새로운 은비다

은비에게 이라는 성씨를 붙인 것은 전적으로 금비 씨의 감각이었다. 그녀의 이름에 가 붙었으니(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구금비 씨의 성이 옛 구()’를 쓰는 것은 아니다!), 은비의 삶은 저와는 전적으로 달랐으면, 하는 의미에서 새로울 신()’을 붙인 것이었다(그 같은 한자를 성씨에 사용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마는, 성명학이 금비 씨 청춘의 언어를 구성할 리는 없으니). 그러나 개명신청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도뿐이 아니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자기들과 이름만 비슷해졌지, 눈코입은 여전히 낯선 은비의 새로운 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금비에게만은 은비는 언제나 새로운 은비였다. 그늘 얘길 했었나? 오래된 금비는 은비에게 드리울 그늘일랑 그늘은 죄 걷어버리려 했다. 설령 그것이 사랑했던 사람의 성씨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일까. 카심이 몇 안 남긴 유품인 그것을 버린 이유도.

 

7. 시간이란 것을 통과하면 웬만한 것은 다 알게 된다

점심시간이 끝난 아이들은 방과 후 돌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두어 시간 더 학교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점심시간 내내, 은비는 창밖에 눈을 던진 채 오물거리고 있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말동무가 없어 그 눈길이 창 너머를 향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화들짝 놀라는 꼴이 꼭 제 발 저린 사람 모양이다. 어쨌든 그 덕분에 은비는 일학년 사반에서 창을 길게 그어가는 빗줄기를 처음 발견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오래 지켜보고 있을 아이도 다름 아닌 은비의 차지일 것이다. 은비는 알고 있었다. 아울러 시간이 지날수록 긴가민가하던 것 하나도 점점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리는 저 비는 아무리 기다려도 그치지 않을 거야. 이렇게 아는 게 많은데은비는 생각했다. 제아무리 긴가민가하던 것도, 알쏭달쏭한 것도 시간이란 것을 통과하면 다 벗어진다고. 멀끔한 꼴로 알아차리게 된다고. 하지만 카심이 떠난 지 벌써 몇 해가 흘렀는데도 엄마가 그것을 버린 이유는 모르겠다. 그걸 알기 위해선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한 걸까.

 

8. 금비 씨만 알고, 은비가 모르는 것

유품이라 여기지 않을 수는 없었나, 하고 은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듯이, 은비는 이미 사라져버린 그것을 두고 생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카심이 금비 씨를 만나기 이전부터, 그러니까 그가 고국으로부터 가지고 온 자그마한 짐 가방 속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금비 씨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지 않았으리라. 왜냐하면 카심이 아니었다면, 카심의 그것이 아니었다면, 너무도 빨리 지나가버린 청춘시절의 금비가 내던 빛을 가둘 수 없었을 터이기 때문. 그러나 사위어버린 청춘의 소실점을 마주한 이즈음의 금비 씨에게 그와 관련한 유품은 은비에게 그늘을 드리울 어떤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거기까진 은비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과연, 그것에 관해 금비 씨만 알고, 은비가 모르는 것이 있을까.

 

9. 생을 이어가기 위해

사고 당시, 카심의 근처에서 그것이 발견됐다고 했다. 현장의 동료들은 그가 산재 판정을 받는 데에 불리한 증언을 했다. 작업이 잠시 쉴 때마다 그는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그것으로 풍경을 담곤 했다는 것이었다. 금비 씨는 의아했다. 그의 작업장은 아름다움과는 한참 거리가 먼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금비 씨의 동료 활동가들도 힘이 되어 주지 못했다. 이상을 위해 싸우는 줄로만 알았던 이들이 한 불법체류노동자의 죽음 앞에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확률에 대해 말했다. 그녀만 공중에 붕 띄워놓고 모든 이들이 현실과 납작하게 밀착되어 있었다. 그녀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은비와 함께 생을 이어가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 그것을 버려야했던 것이다.

 

10. 세상이 번쩍이고, 손이 하얗게 변하고

한참 동안 떨어뜨린 고개를 들자, 처마 끝으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은비는 무언가 큰 결심을 한 듯 한 걸음, 또 한 걸음 빗속으로 내딛기 시작했다. 금비 씨는 두방망이질치는 심장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와중에도 이게 얼마나 오랜만에 타는 택시지?’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리곤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쫓아버렸다. ‘은비가 기다릴 텐데비 맞으면서 벌써 가버리진 않아야할 텐데……우산을 쥔 금비 씨의 손이 하얗게 변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세상이 번쩍였다. 하늘 어딘가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소리가 뒤이어 따라왔다. 운동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저만치 먼 곳에 은비가 있었다. 은비는 번개가 칠 때마다 우뚝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작은 몸을 움직였다. 금비 씨의 목을 무언가 꽉 잠그고 놓아주지 않았다. 입을 떼면 금방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 아주 잠시간, 금비 씨는 은비를 부르지 못했다.

 

0. 둘의 하늘은

금비 씨는 거친 숨을 뱉으며, 은비의 어깨를 꽉 움켰다. 다행히 은비가 우산 없이 걸어온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다. 되돌아 둘이 운동장을 지를 길은 꽤 멀어보였다.

비 맞잖아. 엄마 기다리질 않고

엎질러진 물 대신 비로 채우기로 했거든.”

?”

아냐. 그냥 괜찮다는 말이야.”

은비야, 엄마한테는 그런 말 안 해도 되는 거야.”

괜찮다는 말?”

그래.”

와줘서 고마워.”

그 말도 마찬가지번개 치는 거 무서웠지?”

아니. 하나도 안 무서운데?”

그럼 왜 그때마다 멈추고 올려다봤어? 엄마가 다 봤는데?”

봤어?”

엄마가 미안, 다음엔 꼭……

하늘에서 카심이 사진을 찍어주거든.”

……?”

……또 번쩍일 땐 같이 찍을래?”

운동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세상이 번쩍였다. 금비은비는 동시에 김치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녹슨 우산살이 둘의 하늘을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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