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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자연적인가 (5)_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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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11-03 21:00 조회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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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분석적 자연주의란 무엇인가? (下)

 

 세계에 대해 인간이 지식을 얻고자 할 때 인간은 이론-구성적(theory-constitutive) 은유를 필요로 한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의인화와 자연화를 메타포로 빈번히 이용해왔다. 인간의 심리, 행동, 사회성을 자연현상으로 비유하는 방식을 넓은 의미의 자연화라고 한다면 현대의 환원적 생물학 뿐만 아니라 고대 중국의 천인상응설, 음양오행을 인간세계에 적용하려는 시도, 여러 우화집들도 일종의 자연주의로 볼 수 있다. 현대 분석철학에서 논의되는 자연주의는 수 많은 옹호자들의 다양한 정의들처럼 여러 맥락에서 쓰이고 있다. H. 글로크(2008)는 자연주의를 다음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1. 메타철학적 자연주의 : 철학은 과학의 분과이거나 과학과 연속되어야 한다.
  2. 인식론적 자연주의 : 자연과학을 벗어나서는 진정한 지식이 없다.
  3. 존재론적 자연주의 : 물질, 에너지, 시공의 물체나 사건으로 이루어진 자연계 이외의 다른 세계는 없다.

 

  존재론적 자연주의는 실재하는 세계에 대한 물리적 환원론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실재는 물리학의 연구 대상으로 포착 할 수 있는 입자 혹은 물리적 측정단위이며 신, 윤회, 유령, 주술, 사회, 도덕성, 종교 같은 초자연적 현상을 부정하거나 그러한 현상 또한 자연현상으로 설명하려 한다. 인식론적 자연주의, 메타철학적 자연주의는 앞에서 다루었던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 천거 이후 심리철학, 윤리학, 미학, 도덕철학 같은 분야들 또한 과학적 지식에 토대를 두거나 연속선 상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일종의 ‘연구정신’이다.

  세 유형의 자연주의를 살펴보면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 ‘과학적 지식’임을 알 수 있다. 사건 및 사태에 대해 가치 중립적으로 기술(description)하는 과학적 태도와 해석학적, 평가적, 규범적으로 접근하는 철학적 태도, 즉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 사이에서 두 설명 체계 사이에서의 일방향성 정보 흐름을 나타낸다. 헌데 이러한 흐름은 G. 무어가 말한 자연주의적 오류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

 

   자연주의적 오류는 한 대상의 소여성과 규범성 사이에서 범주오류(category mistake)를 범할 때 발생한다. 가령 진화생물학 교과서에는 수컷과 암컷의 자연적 성질에 대한 기술들(짝짓기 선호 패턴과 같은)이 등장 한다. 진위여부를 떠나 이 명제들이 모두 참이라고 가정 할 때 이를 기반으로 성차별, 성범죄, 성소수자 혐오, 젠더 비대칭성, 젠더 폭력과 같은 사회적, 당위적, 규범적, 정치적 현상을 진화-환원적으로 설명 하려 하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인간은 오롯이 유전자에 의해 합성된 존재도, 사회적 담론으로 구성된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자연주의적 오류는 영국의 철학자 G. 무어가 <윤리학 원리, 1903>에서 처음 도입한 개념이다. <원리>에서 무어는 ‘좋은(good)’이라는 개념을 분석하는데 그는 ‘좋은’은 단순하고, 정의불가능하고, 분석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이런 결론에 따라 도덕적, 정치적 개념들을 자연적 개념들로 정의하는 것은 오류, 즉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어에 의하면 규범적 평가 개념인 ‘좋은’을 정의하는 일은 ‘노랑’을 정의하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노랑’은 매개개념 없이 직관적으로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단순’하다. 이 감각질은 다른 개념들에 근거해 정의할 수 없다. 색은 색 그 자체일 뿐이며 관념적인 무언가를 더 개진 할 수 없다. ‘좋은’도 마찬가지이다. 무어는 ‘좋은’이 단순하고 정의 불가능하다는 그의 ‘미결 문제 논증’을 통해 옹호한다. 그는 “어떤 정의가 제시되건 그렇게 정의된 복합적인 것에 대해 여전히 언제나 그것 자체가 좋은지 의미 있게 물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가령 공리주의(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따라 ‘좋음’을 ‘쾌락’으로 정의해보자. 18세기 미국에서는 노예제를 유지하는 것이 미국인 최대 다수에게 최대 쾌락을 산출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노예제가 좋은 제도인지는 불분명하며 재의미화 가능성에 열려있다. 자연주의적 오류는 단순히 정의적 오류(‘좋은’을 다른 기술적 용어로 정의하려는 시도)에 그치지 않는다. 흄이 지적한 적 있듯 사실로부터 당위를 연역하려는 오류이다. 사실과 가치, 객관성과 규범성 사이에는 간극이있다. 전자로부터 후자를 도출 할 수 없다. 

 

물리주의의 도그마

  ‘데카르트의 동화’ 장에서 다루었듯 데카르트는 후대 철학자들에게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가지 유산을 남겼었다. 이중 세계의 모든 실재가 물질(물리법칙)이라고 여겼던 부류는 유물론 혹은 물리주의로, 정신이라고 여겼던 쪽은 관념론으로 기울게된다. 현대 분석철학계의 트랜드는 물리주의였으며 J. 설의 이야기처럼 물리주의 노선을 이탈한 철학자는 이단자로 낙인 찍혀야 했다. 분석철학자들이 물리주의를 신봉하는 이유는 현대 물리학, 생물학과 양립가능하며 상호협응이 가능한 철학적 시스템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리주의에서 말하는 ‘물리적’이란 무엇일까? 이때 물리는 현대 물리학과 관련되어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다루는 시공간 개념과 기본적 입자개념들을 ‘물리적’인 것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이 물리적인 것들의 특징으로는 입자성, 비정신성, 비목적론성, 보편성, 양화가능성 등을 나열할 수 있다. 하지만 뉴턴 시대의 물리학과 양자역학의 태동 이후 물리학이 다루고 있는 ‘물리적 대상’이 상이한 것처럼 이 개념도 역사 의존적이며 물리학 또한 완성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학문이다. 역사에 의해 재구성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 물리학들이 가족유사성을 지니고 각자 설명 영역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뜻이다. 물리주의가 학자들의 기대만큼 세계의 실재성에 대해 아름답게 설명 할 수 있을까? 탁월하게 처리 할 수 있는 영역과 아닌 영역이 있다.

 

다음 장에서는 물리주의의 핵심논제와 아포리아 그리고 대안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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