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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세이> 여기 또는 저기의 말들, 또는 끝들_박정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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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10-03 10:48 조회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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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또는 저기의 말들, 또는 끝들

   

박정웅

   

얼마 전 tvn 드라마 한 편을 보다 말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림과 소설은 카메라의 발명에 의해, 그들 자신을 더 잘 알게 됐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발명 당시 그림을 그리던 이들과 소설을 쓰던 이들의 당혹감까지야 나로서는 가 닿을 수 없겠고, 그저 단순히, 결과적으로 그림은 더욱 그림적이게, 소설은 더욱 소설적이게 됐지 않은가, 하는 생각.

개개인마다 견해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영상의 형태를 띤 서사가 범람하는 가운데 영화나 드라마가 할 수 있는 표현, 그것도 소설보다 더 효과적으로, 잘 할 수 있는 표현에 소설이 굳이 목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성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 소설이 여러 이야기 매체의 원로 격으로서 여지껏 감당해온 남다른 몫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이마저도 2019년에 할 이야기는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여전히 이야기 매체의 대표로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지는 않는다. 요즘처럼 언제 어디서든 영상으로 된 다양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시대라면, 소설은 생래적인 여건 자체가 대중성을 수반하기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오늘날 소설은 얼마 남지 않은 대중성을 놓치지 않으려다 도태되느냐, 더욱 소설적인 것을 발굴해내고 매진하느냐, 의 갈림길에나 있지 않을까. 이제 소설은, 차라리 저 자신 안쪽 깊숙한 곳으로 파고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이야기 이전의 상태로, 언어 그 자체로. 내가 보기에, 헬레네 헤게만의 아홀로틀 로드킬은 그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아홀로틀 로드킬은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홀로틀 로드킬에는 처음부터 줄거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미프티와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또는 작품 속 여러 공간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구조를 추려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분석은 작품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의 궁리 끝에서야 가능한, 낱말 그대로 분석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것을, 그러니까 그 분석의 결과물을 작품 내 일정한 흐름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스토리라인 요약에 활용하는 순간, 작품은 훼손된다. 그건 작가로서 헤게만이 숱한 단서를 각각의 자리에 배치한 의미, 그리고 화자 미프티의 중얼거림의 흐름에서 엿볼 수 있는 편집증적 증세, 마약 흡입, 무의식적 삶의 태도 등을 깨트리는 일이니까. 여하간 이 작품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고전적인 틀 안에서 중심 인물과 주변 인물 사이의 사건과 갈등, 그 해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아홀로틀 로드킬에는 오로지 말과 말과 말, 그리고 다시 말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말은 단순 정보의 그릇이거나, 묘사의 그릇이 아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불편하지 않은, 세련된 중얼거림들. 이미지는 편린의 형태로 서로 동떨어져 기억될 뿐이고, 시간의 흐름은 사실상 제대로 정리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어느새 독자는 자신의 문법을 파괴하면서까지 작가(화자)의 문법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게 되는 힘이 있다고 할까. 불쑥불쑥 이미 본 적 있는 단어가 나타나서 부싯돌처럼 불길을 일으키면,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알 것도 같은 느낌, 여기가 아닌 어딘가와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한 느낌……. 게다가 소설 특유의 수많은 인용은 소설이라는 가상의 무대와 현실을 생산적으로 잇는 터널처럼 뚫려 있어, 독자가 갖가지 화물을 잔뜩 실은 트럭을 이끌고 쉴 틈 없이 드나들게 하고, 결국 가상과 현실의 경계란 애초부터 무의미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것을 완벽하게 무너뜨린다.

분명 순차적으로 적혀 있는 글자들이지만, 선형적이지는 않은 이야기. 집에서의 말이었다가, 택시에서의 말이었다가, 클럽에서의 말이었다가, 이메일 속의 말이 되는 말. 어디서든 시작되고 어디서든 끝나는 말. 끝이 나서도 끝이 나지 않는 말. 아홀로틀 로드킬, 적어도 나에게는 소설이 이야기성에 기대지 않고도, 강렬한 실존성을 가질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작품 내내 두드러지는 현재형 진술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 명백하게 있는 것이다. 확인할 수 없는 거짓말처럼, 감쪽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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