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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년_김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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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463회 작성일 19-09-30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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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년

 

김석화

 

 

그녀의 하루는 기억으로 열리고 기억으로 닫힌다.

 열쇠로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서면 그 곳은 어제의 시간, 흔적을 그대로 품고 달려든다. 말끔히 정리를 하고 가도 그렇다. 밤새 무언가를 품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서면 그대로 놓아버리듯 풀어놓는다. 공간의 응집력은 질겨서 사람이 치우고 헤집어 놓아도 스스로 돌돌 말고 풀곤 한다. 그래서 매일 아침 그녀가 만나는 것은 새로운 하루가 아닌 전날의 자국, 체취, 형상들이다. 책방에 왔던 누군가와 또 누군가들. 그들이 사간 어제의 책. 그녀가 읽다 덮어둔 책. 열리고 닫히는 문에 대해, 그것들에 대한 기억으로 하루는 시작된다.

 종일 혼자였던 어느 날이었다. 책을 읽다 지쳐 턱까지 늘어진 졸음을 깨우러 아주 잠시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눈만 내놓고 꽁꽁 싸맨 좌판의 할머니들, 어묵과 호떡의 뜨거운 냄새와 사람들의 잰 걸음들이 언 공기 속에 있었다. 차고 뜨뜻한 것들 사이를 돌아 빠른 걸음으로 돌아가는데 누군가 책방 앞에 서 있었다. 안쪽 공간을 유심히 살피면서. 종아리의 붓기는 다소 풀리고 머리는 맑아졌는데 왠지 모를 낭패감이 들었다. 잠깐의 어긋남이다. 종종 이럴 때가 있다. 얼른 문을 열고 미안한 마음에 무슨 말인가를 막 했다. 그런데 앳되어 보이는 손님은 말 없이 책들을 살폈다. 들어왔다가 바로 나가는 사람들과 달리 작은 서가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한탸족이구나. 어쩌다 찾아오는, 모르는 손님들의 일부는 그러했다. 느린 걸음, 수줍어하는 표정, 말 없는 말투, 두 벽면의 책장을 여러 번 훑어보는 움직임. 그 손님이 그러했다. 아니 그 소년이라 해야겠다.

 책방에서 막 시작한 문학읽기 모임에 대해 수줍게 물어왔고, 참석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독서 모임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수능을 얼마 전에 봤다는 말이, 작게 타들어가는 말끝에 묻어나왔다. 짧은 머리카락과 흔적을 남기고 있는 약간의 여드름, 안경 너머 숨은 눈, 아직은 여린 어깨. 소년에게 물었다.

 “평소에 소설 읽어요?”

 “아니요, 저는 시를 읽어요.”

앗, 전에 왔던 그 청년처럼 이 소년도 시를 읽는다고 한다. 청년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 손님에게도 시집이 많지 않다고 부끄럽게 말했다. 소년은 소설 한 권과 시집 세 권을 골랐다. 

 

-『죽음의 자서전』 김혜순, 시집

-『내가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심보선, 시집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 에밀리 디킨슨, 시집

-『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소설

 

그런데 소년은 지금 돈이 없으며, 곧 다시 오겠다고 보관해 달라고 한다. 

 

 며칠 후 같은 시간 즈음 소년이 나타났다.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며. 알바해서 처음으로 받은 돈을 들고선. 독서 모임 참가비까지 미리 내고, 골라 두었던 책을 사갔다. 그리고 독서 모임에 참여한 후 재수 공부를 한다며 서울로 떠났다. 그 동안 문학읽기 모임에서 읽었던 책들을 정리하다 그 소년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후에 소설을 더 읽었을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혹은 묻지도 못한 그 손님들은 책방에서 사 간 책들을 다 읽었을까. 책을 다 읽으면 다시 오겠다던 그 손님들은 다시 올까. 그들에 대한 기억으로 보내는 한낮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