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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세이> 어떤 진실_박정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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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04 10:05 조회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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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세이>

어떤 진실

박정웅

 

처음 읽은 배수아의 소설은 1998년 출간된 중편 소설 『철수』였다. 그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배수아의 이미지는 말로만 들어왔던 배수아의 이미지, 즉 특유의 비문 섞인 문체, 그 자유분방함으로 하여금 발생하는 묘하고 개성적인 분위기 등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철수』는 처음 배수아를 읽었던 때의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말로만 듣고 가져왔던 배수아에 대한 환상은 어느 정도 들어맞는 면이 있었다. 다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배수아의 소설은 문체나 분위기 이상의 어떤 힘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힘이 무슨 거짓 따위에 가려져 있었던 것은 아닐 텐데, 나는 그 힘에, 그리고 이 글의 제목에 ‘어떤 진실’이라는 이름을 붙여두고 싶어진다.

1988년, 화자는 경기도에 있는 한 대학의 임시직원으로 일했다. 이 소설은 그로부터 1년간 화자가 겪은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근무 중에는 강남대학교 강진구 교수인 줄 알았지만 평범한 회사원이자 야간대학의 시간강사로서 범죄사회학을 강의하는 남자로부터 데이트 신청 비스무리한 것을 받기도 하는데, 화자는 수락도, 거절도 아닌 의사를 표한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있고, 어머니는 하루하루를 술에 절어 살고 있다. 청와대 경호부대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는 10년 터울 오빠는 하는 일마다 실패했던 많은 평범한 사람 중 하나였고, 중학교에 다니는 10년 터울 여동생은 오빠나 화자가 수학여행을 가지 않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과 달리 수학여행을 가고 싶어 울상이다. 그런데 군대에 간 철수가 휴가를 나왔다.

철수는 어릴 적부터 오래 알고 지내는 동안 이성으로 느껴본 적은 없는 친구였다. 그랬던 철수가 달라진 눈빛으로, 달라진 모습으로, 달라진 태도로 휴가를 나왔다. 자기네 집으로 가자는 철수의 말에 화자는 저녁에 알바를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면서도 철수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아 그러기로 한다. 그리곤 관계한다. 철수 입장에선 낯부끄러울 만큼 어설픈 관계였다. 화자 입장에선 이처럼 시시한 걸 남자애들은 왜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관계였다. 그리곤 철수의 어머니를 만난다. 철수의 어머니는 화자에게 어느 대학을 다녔는지, 부모님은 계시는지, 형제가 어떻게 되는지, 대학에선 무엇을 전공했는지, 몸은 건강한지, 운전면허증이나 교사자격증은 있는지, 직장은 어디를 다니는지, 월급은 얼마나 되는지, 오빠는 뭘 하는지, 아버지는 뭐하는지를 물어대고, 화자는 황급히 자리를 떠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자는 대학 사무실에서 철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철수가 좋아하는 닭요리를 들고 연천 군부대에 있는 철수에게 면회를 가달라는 부탁이 통화의 주된 내용이다. 화자는 다신 얼굴 볼 일 없길 바라며 승낙한다. 그리고 주말에 있을 범죄사회학 강의 대신 철수를 보러 가야 한다는 사실을 되뇌며, 강의를 들으러 갔다면 강사에게 제출하고 나갔을 메모를 상상한다. 요약하자면,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면회는 예상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애써 닭요리를 들고 연천 군부대까지 갔더니 이곳에선 김철수씨를 만날 수 없다는 답변을 듣게 된 것이다. 화자는 그를 만나려면 버스를 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정류장에선 살해 용의자인 히피 분위기의 젊은이들을 찾는 경찰서 안내문을 읽는다. 겨우 훈련장에 도착해선 김철수 실습소대장이 부대에 둘이라며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우여곡절 끝에 PX로 돌아가서 만난 철수는 화자의 모든 경험담을 착각 취급하며, 도리어 신경질을 낸다. 모든 게 식어버린 닭의 시체처럼 엉망진창이 된 것이다.

이후 10년 터울 오빠는 일본에 가 청소용역업체에 취직하고, 10년 터울 여동생은 미용사도, 모델도, 게이도 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간다. 어머니는 여전히 술에 절어 살면서, 너(화자)를 기르는 데 든 돈을 갚기 전엔 이 집에서 나갈 생각하지 말라고 겁박을 하고, 화자는 감옥에 있는 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쓴다. 그러면서 죽고 싶다던, 억울하다던 아버지, 독이 묻은 편지를 써 보내달라던 아버지, 그것을 먹고 죽겠다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화자는 자신이 여지껏 보낸 편지를 아버지가 모두 먹어치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1998년―소설이 출간된 시점의 현재와 만난다. 화자는 10년 간 여러 직장을 거쳤고,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한번은 강남대학교 강진구 교수인 줄 알았지만 평범한 회사원이자 야간대학의 시간강사였던 남자와 1988년 연천 군부대에서 복무 중이던 김철수 실습소대장을 연상시키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며 왜 시간은 반복되는가, 자문하기도 한다. 또 한번은 어떤 남자와 16번지로, 그러니까 화자네 식구들이 살았고, 이제는 푸른 곰팡이와 거미의 나라가 되어버린 음침한 16번지로 들어간다. 그리고 관계한다. 그리고, 그리고 묻는다. 혹시 1988년에 연천에 있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때 꿈속에서 눈이 내리는 낚시터 옆 군부대나 영양실조에 걸린 군인들, 죽은 닭을 본 적은 없는지.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고 남자는 되묻지만, 거기선 묘한 현실성이, 진실성이 풍긴다. 그렇게 16번지에서 나와선 남자의 차 안에서 10년 전 살해 용의자였던 히피 분위기의 젊은이들을 연상시키는 세 사람을 목격한다. 남자는 못 보고, 화자만 본다. 독자도 본다. 자연스럽게, 어떤 진실을 마주한 기분이 든다.

나는 이러한 면들이 배수아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돌적인, 과감한 비유는 언뜻 비문으로 보일 때가 있고, 이러한 자유분방한 글쓰기의 태도는 그녀의 문체에 묘하고 개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설이라는 형식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서사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 역할이 상당 부분 축소되어 있는, 그리하여 나머지는 불확실한 기억과 느낌의 서술, 말장난의 패턴으로 채워지는, 그 불확실성과 짓궂은 장난스러움이 오히려 어떤 진실성으로 이어지는……. 『철수』의 빈 페이지에 나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나는 이제라도 한 권씩, 그를 알아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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