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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자연적인가 (번외편)_수림(修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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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23 21:20 조회1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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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자연적인가 번외편 - 절대적1) 운명론의 테트라렘마(tetralemma)

 

 우리는 운명에 대해 완전한 앎을 얻을 수 있을까? 전지전능에 근접한 연산능력을 지닌 컴퓨터가 있다면 운명도 계산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운명이란 무엇일까? '운명'이란 토끼의 뿔, 거북이의 털, 붉은 청어, 신자유주의적 정의, ‘2019년 현재 한국의 국왕’과 같은, 존재론적 기초가 튼실하지 못한 개념일수도 있다. 운명에 대한 지식들을 분별하는 순간 버그들이 발생 한다. 우리는 형식상 운명에 대해 4가지 판단이 가능하다.

 

A: 운행이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운행에 대한 ‘앎’과 무관하게 특정 시공간 교차점에서 사건이 발생. 이 인과성에 개입하는 건 불가능하다. 즉 운행을 알고 미리 관리하는 게 불가능하다. '인과성에 개입한다(혹은 ‘운명에 대해 앎’이라는 운명적 사건)'는 구체적인 사건들 또한 메타적으로 보면 총체 인과성에 환원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총체 인과성’은 ‘총체-총체 인과성’에 환원된다. 이 과정은 무한히 이어진다. 존재와 인식이 뒤엉켜서 풀 수 없게 된다. 다음과 같은 사고실험이 가능하다.

 가령, 명리학적으로 10자가 동일한 A, B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A는 35세가 되는 해 3월에 급사, B는 천수를 누리다 150세에 열반했다고 할 때 다음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다. A는 25세 때 명리, 주역, 점성 연구를 통해서 35세가 되는 해 묘卯월에 건강상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 할거라 예상하고 10년간 꾸준히 건강관리를 해왔고 B는 점복학과는 무관하게 인생을 살았다. 이때 A에게 있어서 '명을 알고 스스로 관리함'이라는 '사건(event)'도 운명의 인과범위에 포함된다고 해석가능한가? 또는 B에게 있어 '운명을 모르고 운명과 무관하게 삶'이라는 '사건'도 인과성을 수반하나? 어디까지가 숙명이고 어디까지가 운명일까? 이 문제를 점복학에서는 영역 분할을 통해서 해결하려 한다. 이 시도는 성공적일까?

 

~A: 운행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연(緣, pratyaya)에 의해 개체의 구조 혹은 사건들이 찰나에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면 미래의 특정 지점에 대해 거시적인 수준(가령, "갑년 을월 병일에 재산상 손실이 올 것이다." 처럼 구체적 재산을 지칭(denoting)하지 않는 널널한 예측)에서라도 흐름을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A & ~A : 정해져 있으면서 동시에 정해져 있지 않다면

 구획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딜레마를 해결하려 시도할 수 있다. 가령, 명리학자들은 명리에 대해 말할 때 그림 그리기에 비유를 하며 8자와 대운은 도화지에 그려진 배경 혹은 전체적인 윤곽선과 같고 구체적인 색감과 형태들은 스스로 채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온건하고 상식적인 이론이다. 편의상 이를 <분할 가능 원리>라고 부르겠다.

 하지만 도대체 두 영역을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법론으로 나눌 것인가? 어디까지가 배경이고 어디까지가 개인인가? 개인에게 주어진 배경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복합적인가, 선천-후천도 둘 다 아닌가? 이 배경에 대한 접근 방법은 인식론적인가? 존재론적인가? 도구주의적인가?

 상호모순을 피하기 위해서 존재의 영역을 분할(결정-미결정)했지만 이는 문제를 더 증폭시킨다. 결정 되는 부분과 미결정인 부분이 있을 때, 미결정적인 부분은 어차피 사유로 접근 불가능한 영역이니 차치하더라도 숙명론적 영역은 왜 결정적인 지 입증가능해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점복학에 암묵적으로 전제된 이 두 영역의 분할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평면만 다루는 것처럼 일종의 공리(axiom)이지 증명된 명제가 아니다. 이 지점에서 <분할 가능 원리>가 지니는 딜레마가 있다. 이 원리는 경험 독립적(a priori)인가 경험 의존적(a posteriori)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점복학의 발전과정에서 두 영역의 외연(denotation)이 달라 질 수 있는데 만약 선험적이라면 어떻게 공리가 경험에 의해서 변화 할 수 있는 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인지 물을 수 있다. 반대로 후험적이라면, 경험적으로 수정 가능한 내용이라서 공리로 쓸 수는 없다.

 

~A & ~(~A) :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정해져 있지 않는 것도 아니라면 언어적-사유적 접근 불가능.

 

왜 테트라렘마가 발생했을까?

 

 연기(interdependent arising)로 보자면 '내(외따로 존재하는 '나')가 이 세계에 던져져서 무언가를 한다' 혹은 '내가 이 세계를 살아간다', '삼라만상이 갑을병정한 법칙을 따른다'와 같은 언명들은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空-假-中) 실상을 온전히 담았다고 볼 수 없다. 불교에서는 경험적이고 일상적인 맥락에서의 자아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실체(substance)로서의 자아는 부정한다. 자성(svabhāva)이 없는 대상(물리적이든 논리적이든 심리적이든)을 자성이 있다고 가정하는 순간 실체론의 오류2)에 빠지게 된다. 

 분명 여러 점복학 장르에서 개체와 환경의 관계를 보는 관점은 연기적이다. 하지만 이 때 연기론은 부파불교 시대 가장 큰 교파였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존재론과 일부 유사하다. 유부有部의 존재론에 의하면 현상세계의 모든 개체들은 연기에 의해 유전변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변, 영원한 요소들이 있다고 상정한다. 가령 동일한 벽돌로 작은 화장실을 만들 수도 있고 만리장성을 쌓을 수도 있는 것처럼 '벽돌'은 실유 한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이와 유사하게 명리학에서는 천간, 지지가 점성학에서는 행성, 항성, 위성, 12궁이 '해석학적 원소'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 원소들은 자기 고유의 존재자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이 세계에 대한 분류방법을 체계화 하는 과정 중에 우연히 발견하게 된, 믿음 체계 혹은 상징 체계들이다. 즉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이치, 자연적인 것(nature)과 비자연적인 것의 경계지음에 본래성이 아닌 작위성이 개입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우주의 이치를 유일신론에서의 '신'으로 인간의 이치를 '언어'로 대치하면 대부분의 점복학에 내재되어 있는 존재구조는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기독교적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언어는 분절적(digital)이라 세계의 구조를 오롯이 담을 수 없음에도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말씀(logos)이 곧 진리로 간주되며 언어와 실재 사이의 긴장관계는 포착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진리가 절대화된다. 반면 불교에서는 종宗과 교敎를 구분한다.(이런 까닭에 religion을 宗敎로 번역 할 때 왜곡이 발생한다.) 불교 내부에서 '종교'라는 말에 여러 쓰임새가 있지만 진리-언어의 관계만 따져 볼 때 불교에서 말하는 종교는 '진리의 상대화'를 뜻한다. 그래서 불교는 宗, 진제(언어로 담을 수 없는 경지)와 敎, 속제(한계에도 불구하고 언어로 풀어쓴 세계) 2제二諦를 말한다. 2제의 관점에서 보면 운명이 존재 할 수 있으나 ‘운명에 대한 앎’은 제한적이고 상대적이다. 이 제한과 상대성에서 도출가능 한 것 중 하나가 마음이다. 우리는 마음에 대해서도 운명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단 하나 알 수 있는 게 있다. 운명을 대하는 사람의 지적 선호도, 심리상태, 가치관, 세계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이상 절대적 운명론이 감내해야하는 철학적 아포리아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해결 혹은 해소하지 않으면 절대적 운명론은 출발자체를 할 수 없다. 대안은 공空, 연기, 유식唯識을 내포하는 상대적 운명론이다.

 

 

1) 여기서 절대-상대는 ‘운행’이라는 전체 설명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인들을 궁극적 ‘실체’로 볼 것인지, 연기적 ‘속성다발’로 간주하는 지에 따라 나눈다.

2) 실체론에 대한 비판은 <딜레마의 형이상학>, 박제철, 2018 1부, <중관사상>, 김성철 2006 2-1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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