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빨

  • 자료실
  • 글빨

자연이라는 신화, 자연은 자연적인가 (4)_수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872회 작성일 19-07-25 12:43

본문

1.212 분석적 자연주의란 무엇인가? (上)

 

  앞 장에서 현대 분석철학의 모태가 되었던 여러 학파들 중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쳤던 논리실증주의에 대해 간략히 살펴 보았다. 현대에도 논리 실증주의의 연구 프로그램이나 존재, 인식론적 틀을 고수하는 철학자는 거의 없다.(특히 콰인의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이라는 논문 이후로는) 하지만 논리실증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속성과 관점들은 계승되어 후대에 남겨졌다. 가령 수학, 논리학, 자연과학과의 밀접한 상호연관성의 추구, 철학을 기술하는 방식에 있어서 논증의 명료성을 선호,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수정-보완하며 고수한다는 철학의 스타일은 암묵적으로 계승되었다.

 

  특히 수학, 과학과의 친화성, 연속성은 일종의 '독트린'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언어철학, 심리철학, 형이상학 등 여러 장르에서 예리하고 탁월한 개념 분석으로 정평이 나있는 철학자들 조차도 '자연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 혹은 해체의 칼날을 들이밀지 않는 기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마치 칼날이 자기 자신을 썰 수 없는 것처럼) 현대 분석철학계에서 '자연주의'를 정식교리로 채택하지 않고 철학적 복음서를 생산해 낸다는 건 이단심문을 받을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가령 미국의 철학자 존 설(John Searle)은, 의식현상은 현상과 실재의 대응관계?1)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하며 현상학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가 미국 철학계에서 '새생기론자(neovitalism)', '내성주의자', '신비주의자' 등으로 여러 비난을 겪어야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도 자신이 '생물학적 자연주의자'임을 주장한다. 다만 그는 종례의 정신-물질의 대립적 구도에 대해서 의문을 품으며 정신현상, 사회현상도 생물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창발론을 지지한다.

 

    무엇이 이토록 분석적 자연주의로부터의 해탈(해탈과 이탈은 다르다.)을 어렵게 만드는 걸까? 중세 스콜라 철학의 질적 다양성을 고려하더라도 토마스주의의 장악범위를 반추 해볼 때 우리는 보통 그 시대 철학을 '신학의 노예'라고도 부른다. 현대에는 철학이 '자연'과학의 노예인가? 먼저, 현대 분석철학에서 자연화 프로그램이 유행하게 된 계기를 제공해준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을 살펴보자.

 

콰인, 자연화된 인식론(Quine, Epistemology Naturalized)

 

  인식론(theory of knowledge,)은 지식의 정당화 문제에 대해 답하는 철학의 분과이다. 인간(지성체)의 지식이 정당화 되는 맥락들, 근거, 기원, 과정, 한계, 형식, 방법론들 그리고 '진리의 의미조건'과 같은 대상들을 탐구한다.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편에서 단순한 억견 혹은 신념(믿음)과 '정당화된 참인 믿음'을 구분했다(물론 그의 분석은 해체적이라 되려 회의론적 태도로 비춰질 수 있지만). 전통적인 인식론에서는 이 정당화의 문제를 놓고 합리주의와 경험주의가 날카로운 논쟁을 벌여왔다. 여기서 전형적인 오해의 영역이 있다. 합리주의는 지식 획득의 도구를 선험적이고 순수한 추론(이성)에 둔다거나 경험주의는 지식의 원천을 경험(주로 감각자료)으로 봤다는 오해이다. 핵심은 이렇다. 이들 논쟁은 암묵적으로 다음을 구별한다. [분석/종합, 선험/후험, 필연/우연] 경험주의자들은 <종합=후험=우연>이라는 프레임을 사용한다. 합리주의자들은 선험적인(!) 종합-후험-필연 명제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칸트가 말했던 '선험적이면서 동시에 종합적인 명제') 콰인은 이 이분법을 붕괴시키고자 했다.?2)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전통적 인식론자들처럼 분석명제와 종합명제가 예리하게 구별된다는 신조(분석성 원리 principle of analyticity)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콰인(W. Quine), 굿맨(N. Goodman)과 같은 학자들을 필두로 분석/종합 구별에 대해 비판과 해체 작업이 시작되었고 일상언어 층위에서는 유의미하게 사용 가능하지만 논리적으로 뚜렷하게 구분 될 수 없는 지점이 밝혀졌다. 이전까지는 철학/과학의 구분이 간단했었다. 검증가능성 원리에 해당되는 것은 과학의 영역이고 종합명제들에 대한 언어적 분석을 감행하는 분석명제는 철학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콰인은 이 구별이 분석성 원리에 기초해 있으며 그 분석성 원리는 '경험주의의 두 독단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과학과 철학의 관계도를 다시 그리려한다.

 

  콰인은 “자연화된 인식론(1969)”에서 흄에서 카르나프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인식론의 역사를 재검토 한다. 그는 논리 실증주의의 지식론을 콰인 방식으로 재기술 하려 한다. 콰인은 철학적 지식들(형이상학, 인식론, 논리철학, 등)이 과학적 세계관에 '토대'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혹은 제공해야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화된 인식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식론은 새로운 형태와 명료해진 지위로 여전히 존속된다. 인식론 또는 그와 유사한 어떤 것은 단순히 심리학의 , 따라서 자연과학의, 한 장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자연적 현상 즉 물리적 인간 주체를 연구한다. 이 인간 주체는 특정한 경험적 현상 즉 물리적 인간 주체를 연구한다.”

 

콰인이 보기에 전통적인 인식론은 과학적 탐구의 기반이라는 지위를 가지는 반면에 그의 견해(새로운 인식론)로는 반대로 인식론이 심리학(양화가능한)의 한 챕터로 흡수된다. 종례의 인식론은 특권적 지위를 상실한다. 그는 이 탈권위화를 '자연화된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이다-진술(is-statement)(혹은 사실문제)과 해야한다-진술(ought-statement)(혹은 당위문제)를 구분 할 수 있다. 콰인은 '어떻게 지식에 도달해야 하는가?는 물음이 '어떻게 지식에 도달하는가?'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철학자들이 믿음의 정당화에 대해 사변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독단이고, 그들의 작업은 심리학이 믿음에 대해 탐구하는 과학적 보고서에 의존해야 한다. 

 

 

철학자들이 장사 접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자연화 프로그램을 수용하거나 주장하는 학자들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좀 더 온건한 형태의 자연주의를 수용한다. 이는 다음 절 <자연주의의 여러 맥락들>에서 이어진다.

 

 

1) 우리는 상상 속의 치킨과 눈 앞에서 냄새 풍기는 치킨을 구별 할 수 있다. 양쪽 모두에 대해서 그 존재의 정당성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 있지만 의식현상은 의식이 실재인지 아닌 지 의심한다는 것(데카르트가 그랬듯) 자체에 의해 그 존재가 정당성을 획득한다.(단, '인식이 있다'는 것, ‘인식은 대상 혹은 사물이다’, '인식이 나'라는 것의 정당화는 별개의 문제) 즉 현상-실재, 원본-복사물의 이분법이 무너지게 된다.

 

 

2) 현재 글의 성격상 콰인의 비판전략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지는 않겠다. 보다 상세한 논의는 ‘논리적 관점에서’, 1993, 서광사/ W.V.O. 콰인, 허라금 옮김 中 2장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