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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통해야말이지_박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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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808회 작성일 19-06-14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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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통해야 말이지

 

박규리

 

이번 여행은 친구가 파트너를 따라 독일로 이주한 덕에 기획 되었다. 일상을 사는 재미도 배워가는 요즘이지만, 여행은 언제든지 환영이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자만했다.

 

‘유럽이라도 사람 사는 곳이지, 뭐!’

 

맞는 말이지만, 나는 생소한 곳에 가는 사람이 차려야 할 예의가 부족했다. 몇 권의 여행서를 뒤지면서 기본 정보를 챙기긴 했다. 정말 기본적인 것만. 통화, 언어, 전기 플러그 모양, 지리적으로 어디 쯤 붙어 있는가, 하는 정도.

나는 해외에 체류한 경험이 어설프게 몇 번 있다. 교환학생, 해외취업, 친구네에 얹혀 살아보기 등. 모두 영어권이었고, 나는 영어를 쓰는 생활에 불편함이 없어졌다. 그래서 여행서가 나에게 이 나라는 독일어를 쓰고, 저 나라는 다른 언어를 쓴다고 해도, 콧방귀나 꼈다. 영어가 되니까! 막상 독일에서 영어로 사람과 대화 한 일이 손에 꼽는다. 단어와 손짓 발짓, 사진 보여주기 말고, 대화! 내가 뭐라고 물어봐도 사람들은 외계어를 뱉었다. 찌푸린 얼굴이 기본이오, 아예 외면하기도 부지기수다.

 

친구가 파트너를 독일인 대표로 세워 물었다.

 

'대체 영어를 알면서 왜 대답도 안 해?'

 

그렇다. 그들은 영어를 할 줄 안다.

모국어가 아니니 유창하게는 아닐 것이다. 개인차, 세대차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독일인은 상당 인구가 영어를 한다. 라디오 채널에서 팝송이 높은 비율을 차지할 정도니, 적어도 알아는 듣는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영어로 말하지 않는다.

 

파트너는 변호했다.

 

'우리는 실수할까봐 영어를 안 써.'

 

내 친구는 깊은 빡침을 동반한 경험담을 풀어 놓았다. 어학원에서, 병원에서, 시내 한 복판의 관광객도 상대하는 가게에서. 독일어를 배우러 온 학생, 응급 상황에 겁에 질린 환자, 여행지에서 느슨한 지갑을 든 소비자를 상대로 실수를 걱정한다고?

 

친구는 독일에서 생활한 지 1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독일어가 어색한 자신이 파트너를 동반하지 않은 자리에서 겪은 설움이 많다. 원래 ‘프로 불편러’인 친구는 지체하지 않고 파트너에게 확인하는 편이다.

 

'나 이런 일이 있었어. 이거 정상이야? 내가 뭐 실수했어? 반응이 왜 이래?'

몇 번인가 고개를 갸웃하던 파트너도 이제는 인정한다. 비정상적인 대우를 받았노라고. 그 원인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의심 가는 이유가 너무 많은 것이다.

 

독일어를 못 해서?

동양인이라서?

여자라서?

어려서?

 

혹은, 다짜고짜 영어로 물어서?

 

싱가폴 호텔에서 일하던 때의 경험이 떠올랐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을 모시고 온 가이드가 리셉션의 세 명을 훑어본다. 동료 중 하나는 독일계, 다른 하나는 말레이시아계다. 가이드는 나에게 다가와 한국어로 물었다.

 

“한국분이세요?“

 

반갑게 답하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어느 날은 로비를 서성이던 두 명의 여성 투숙객이 저들끼리 고개를 끄덕이다 다가왔다. 두 문장이 지나가고 나서야 일본어임을 알았다. 나는 일본어를 고등학교 제2 외국어로 배웠다. 그래봤자 아는 문장은 손에 꼽는다. 대신 호텔에 취직하자마자 몇 문장을 외웠다. 발음이고 억양이고 따지지 않고, 기계처럼 입에 붙였다.

 

“저는 한국인 입니다. 영어 할 줄 아세요?”

 

짧은 영어 단어와 사진, 지도를 이용해 안내하고, 흥건한 진땀을 훔치며 뿌듯함에 미소했다. 어느 저녁에는 외출하고 돌아오는 투숙객이 로비를 직선으로 가로질러 나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도 두세 문장이 지나고 깨달았다. 중국어구나! 당장 동료를 붙들고 물어 중국어도 몇 문장 외웠다.

 

물론, 대화는 일단 말이 통해야 한다. 누구나 내가 모르는 언어로 다짜고짜 말을 걸면 놀라고 불편해 한다. 다소 친숙하거나, 단어쯤은 조금 아는 언어라도 그렇다. 어린 나이부터 영어를 접했어도 말하기, 쓰기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다. 나도 영작문은 질색이다.

 

그렇다고 언어가 다는 아닐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고 하는 게 제대로 된 대화가 아닐까? 상사와 대화하는 법, 신조어를 남발하는 조카와 대화하는 법, 갱년기를 맞은 부모님과 대화하는 법, 사춘기 자녀와 대화하는 법, 심지어 내가 나와 대화하는 방법도 다를 것이다.

 

독일과 국경선을 마주한 네덜란드를 여행하는 어느 날, 반나절짜리 투어를 참가했다. 버스와 페리를 타고 내리며 근교를 돈다. 70유로짜리 치고 내용이 부실해서 몹시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구석구석에 다양한 언어 사용자를 위한 배려가 깃들어 있었다.

 

버스에 동승한 가이드가 세 명,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가 총 6가지다. 관광지에서 자세한 설명을 담은 리플릿은 최소 3가지 언어로 준비되어 있었다. 네덜란드도 고유한 언어가 있다. 모국어를 포함해 최소 2개 언어, 혹은 3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세 명이나 고용 된 호화 투어였던 것이다. 물론 버스 운전사는 별도다. 그제야 70유로가 이해되었다.

 

모든 여행서가 빠짐없이 그 나라의 간단한 인사말을 소개한 사실이 떠올랐다.

 

‘아이고, 남의 예의를 논할 계제가 아니었구나.’

 

 

물론 다른 차원의 이유를 가진 무례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국을 여행하며 현지인에게 먼저 대화를 청하는 사람으로서의 예의 한 가지는 확실히 배웠다. 영어는 분명 국제적으로 비교적 인지도가 높지만, 비영어권 모두에게 살면서 배우고 익혀야 할 외계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