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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가는 그림판 6> 의뭉한 조정태 새벽그림_신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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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6-06 09:41 조회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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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가는 그림판 6>

의뭉한 조정태 새벽그림

- <민중미술 2019 - 미세호흡> (2019.06.07.-08.31., 민주공원 등)


신용철_민주공원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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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해에도 민중미술전시를 채비하고 있다. 우드스탁페스티벌 50, 민중미술 50(현실동인 제1선언 이후), 부마민주항쟁 40년을 맞이하는 <민중미술 2019 - 미세호흡>은 다시 얼을 차리고 너름새를 가다듬으며 민중미술 2020 오딧세이를 설레고 있다. 2014년에 마련하고 2015년에 넓힌 민중미술가열전/민중미술현장/민중미술소장작품전/로컬리티영상이라는 바퀴를 다시 굴리며 다섯 가지의 섹션을 세웠다. 전시공간을 원도심에 머물지 않고 부산진구청까지 넓혔다. 내년에는 나라 밖으로까지 넓혀보려 한다.

 

어제는 민중미술가열전 양호규섹션 큐레이터를 맡은 정재운과 58점 작품을 전시실 아래위로 옮기고 들여다보고 거느라 쎄(‘를 일컫는 부산말)가 만발이 빠졌다. 자고 일어나니 온몸이 삐그덕거린다. 이제 쉰이 되어서 그런가. 아직 마당에서 나갈 나이는 아닌데. 책상물림이라고 제 스스로를 일컫는 정재운도 아마 몸살이 났으려나?

 

큰 전시를 앞두고 달뜬 마음으로 새벽에 일어나니 책상머리에서 내가 나를 째려본다. 지난 216일 새벽에 광주에서 의뭉한 조정태가 그린 새벽그림이다. 나는 이 날 부산가는 첫 버스를 탔다. 새벽그림은 나중에 가방에서 나왔다. 기억이 희부윰하다. “광주에서 신용철을 그리다, 광주에서 신용철, 광주에서 헬렐레”. 그리는 지도 헬렐레, 그려지는 나도 헬렐레. 이것은 입이 내는 소리가 아니여. 이것은 붓이 그리는 것이 아니여. 그럼 이것은 술이 그리는 헬렐레. 작가와 큐레이터는 헬렐레도 대동단결.

 

나는 조정태를 2014년 우리 전시마당으로 모셨다. 그 전에도 민중미술 마당에서 스치듯이 만났다. 스치듯이 만났다는 것은 같이 찐하게 술 한 잔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2014년 그를 전시마당에서 만나면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 그의 의뭉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민중미술 2019’를 채비하는 새벽에 조정태가 그린 낯선 큐레이터가 나를 째려본다. 늘 낯설고 날서게 바라보라. 그리하여 사라짐으로 살아가는 큐레이터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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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태 작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2014년 전시글과 포스터를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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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태 초대전 현실의 문턱, 문턱 너머 현실

신용철_민주공원 큐레이터

 

의뭉한 고집스러움

조정태는 민족미술인협회(이하 민미협’) 광주지회 지회장이다. 그는 작가, 기획자, 조직가라는 따로 또 같은 꼴들로 함께 살아가는 셈이다. 따로 또 같은 꼴들로 살아가고 있는 마음자리는 민미협이라는 틀이다. 민미협은 민중미술의 바탕을 일구어온 창작자 동아리이다. 민미협의 이름 앞에는 1979현실과 발언이 있고, 1969현실동인 제1선언이 있다. 그 큰 흐름 속에서 갖가지 태도들이 나뉘고 불거져 민중미술의 결과 켜를 이루었다. 민중미술의 흐름을 거머잡기 위해서는 갖가지 태도들이 빚어내는 파사드의 결을 굽어보아야 한다.

조정태는 민중미술 파사드에 스스로 흩뜨린 눈들이 되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파사드의 본디 결을 따르되, 줄곧 제 결을 놓치지 않았다. 이런 의뭉한 고집스러움이 작가, 기획자, 조직가로서의 따로 또 같은꼴들을 피워내고 지켜냈다.

 

계통발생으로서의 개체발생

식민지 시기 이식된 근대화로 우리의 근대미술(예술)사는 서구의 사조가 뒤섞여 난장판을 이루었다. 우리 스스로 마련하려던 근대미술의 씨앗들은 난장판 아래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1969현실동인 제1선언은 한국미술이 마련한 제 씨앗을 불러내고 한국근대미술의 계통을 바로 잡으려는 첫 씨알의 외침이다.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1979년의 현실과 발언을 불러내었고, 어렵사리 마련한 민중미술의 바탕들을 일구어왔다.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이 제 이름값으로 불려지지 않는 마당에 형상미술, 리얼리즘미술, 참여미술, 저항미술 따위의 말들이 민중미술의 이름을 지우거나 흐리면서 제 너름새를 뽐내고 있다. 민중미술이 낳은 새끼들이나 그 동무들이 모두 제 멋에 취해서 민중미술의 바탕을 휩쓸고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민중미술의 본디 흐름에서 따로 또 같이놀았던 조정태를 낯선 눈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조정태라는 미술가의 개체발생은 한국민중미술사의 계통발생 과정의 조각들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그가 보여준 160여 작품들 중 35점이 이번 전시에 나온다. 나는 160여 작품의 모두가 이루는 꼴을 그려보고 이를 몇 가지 범주로 이름을 붙여 보았다. ‘기록의 연대’, ‘괴물이 살고 있다’, ‘문턱을 베고 누운 이’, ‘사나운 꿈자리라는 네 가지의 켜들이 시대, 공간, 소재를 타고 넘으며 갖가지 결들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별들에게 물어보아야 하나?

민중미술의 마당에서 부대끼며 바라본 그 시대 삶의 정경들을 그는 <회의> 연작, <이주노동자> 연작에서 낱낱이 그려내고 있다. 뭇삶을 들여다보는 마음자리는 내 자리에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다. 나와 그들의 자리를 하나의 마음자리에 놓고 보는 연민의 마음이다. ‘연민의 마음바탕 안에 그들도 나도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곰곰이 들여다본 뭇삶 속에 도사리고 있던 괴물의 낌새가 언뜻언뜻 비치고 있다. <일상의 시간> 연작에서 의사민족주의는 단군이나 이순신의 탈을 쓰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한국적 국가주의는 우리를 <몸빼>, <교련복>, <예비군복> 속에 가두어 훈육하고 있었다. 우리 땅의 나무와 숲들을 스쳐가는 시간(<-황사>, <여름-당산>, <가을-단풍>, <겨울-당산)도 기괴하기 짝이 없다. 괴물을 만들어온 시간과 공간이 일베가 살아가는 <몽환의 방>이다. 우리가 곧 일베이고, 우리 안에 괴물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일베가 되어 약육강식의 지옥도 <군상>을 빚어내었다.

인식알아차리는것이다. ‘아는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마당을 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린 이는 괴롭다. 알아차린 오이디푸스는 제 눈을 파버린다. 이것이 오이디푸스가 맞닥뜨린 비극적 알아차림의 한계이다. 이 때 조정태는 현실의 문턱을 살짝 베고 누워 스스로를 들여다본다. 제 눈알이 제 몸을 보고 있거나, 제 눈알이 제 마음자리를 바라보고 있다. <자화상> 연작 등에서 우리는 평범하디 평범한 한 인간의 본디 바탕을 만난다. 우리 모두의 본디 바탕은 어지자지하다. 어지자지한 것들이 어떻게 만나 어울리느냐에 따라 우리는 숭고해질 수도 있고 천박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의뭉함은 타고난 듯이 보인다.

작가의 마음자리를 거슬러 거슬러 가다보면 정말 하늘의 <별이 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세월의 눈발에 갇혀 흐릿해져 가는 <겨울망월>의 동무들은 하늘의 별이 되었을까? 그 하늘의 별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우리는 길을 찾아 갈 수 있을까? <신천하도>를 붉게 싸지르고 있는 마음자리는 하늘에 올라간 별들의 마음자리인가, 작가의 마음자리인가?

 

주례사였으면 좋겠다.

작가의 의도나 작품을 읽어내지 못하는 미술글이나, 작품과 동떨어진 이론의 현학을 뽐내는 미술글을 쓰느니, 차라리 따듯한 주례사를 쓰고 싶다. 작가도 모르고 쓰는 저도 모르고 읽는 이도 모르는 어려운 글을 쓰느니, 차라리 작가와 보는 이를 맺어주는 주례사를 쓰고 싶다. 그런 마음을 가진 나의 전시글은 주례사이다. 작가가 세상과 만나 싸우고 웃고 울었던 사연을 풀어 보이는 주례사이다. 우야든동 작가와 독자가 세상을 사이에 두고 만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찌지고 볶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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