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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필체_이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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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5-30 13:02 조회1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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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필체 

 

이기록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무르면 그는 아주 쉬운 일이야. 만일 그 개가 당신의 개라면 말이지만 아니면 내 손에 빵이라도 들려 있으면 그 개가 꼬리를 흔들면서 내 손에 딱 와 닿잖아? 그것과 같은 이치지.”

 

오래전에 사둔 무라카미 류의 책을 뒤적이다가 뒤쪽에서 오래된 메모를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필체일까요? 낯이 익은 걸로 봐선 저의 필체일 수도 있겠으나 흘러가는 듯한 분위기가 저의 필체는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과연 누구의 필체일까요? 지금은 되새겨지지 않는 어떤 책의 메모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잠시 잠깐 떠올린 누군가의 창작의 흔적일 수도 있는 메모는 아주 오래 전의 상념처럼 잃어버린 듯 잊은 필체를 통해 어떤 순간을 기억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래된 메모는 제게 무슨 추억을 선사하기 위해 갑자기 제 정체를 드러냈을까요

 

오늘은 우연히 20년 전쯤 사둔 무라카미 류의 책에서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흔적을 남긴 글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한없이 투명한 기억들 사이에서 끄적이는 일들을 어느 정도 뒤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마다 자신만의 습관이 제각각 있겠지만 저도 책을 사면, 책의 속표지에 책을 샀을 때의 기분이나 순간의 짤막한 감상들을 적어놓거나 책 위쪽에 영역표시를 하듯 제 사인을 적어놓는 것이었습니다. -혼자만의 독특한 습관은 아닙니다만- 언젠가 그 메모의 가장 중요한 일부를 잃어버린 후, 괜스레 관계가 왜곡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돼 이런 버릇들을 수정하기로 했습니다. 제 손에 딱 와 닿는 느낌도 얼마간은 사라졌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5월의 마지막 날이 다가옵니다. 요즘은 계절이 변하는 것이 더욱 가파르게 움직이는 듯합니다. 문득 한 달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 얼마나 많은 일들을 글로 썼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두꺼워진 새끼발가락 같은 어색한 불면들이 돋아납니다. 아마 하릴없이 일들이 이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관대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핑계를 만들어서 합리화시킨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충족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들이 5월에는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글을 쓰는 이유는 현실의 구속을 벗어나고자 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벗어나고자 함이 다시 구속이 될 수도 있지만 글은 무엇을 가능하게 할까요. 글을 쓰는 일들이 많아질수록 제 안의 질문은 더욱 깊은 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듯합니다. 오늘은 무사한 당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의 5월은 1년 뒤, 또는 10년 뒤 제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제가 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아직 어설픕니다. 감정을 제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글을 쓴다는 것은 바다 밑바닥을 기어가는 햇볕과도 같은 술 취한 자의 넋두리일 지도 모릅니다. 아직 분명하지 않은 질문들이 어둠을 뚫고 올라옵니다. 모르는 사이에 태어난 별들이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듯 질문들은 어느 순간에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진심을 담았는지가 중요할 뿐이지요.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게 된다면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 이 순간 어디서든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오늘은 그 징후를 기다립니다. 갑작스런 경험들을 붙잡고 이어가는 글들은 안개처럼 모호합니다. 책들을 꺼내 징후들을 다시 읽어볼 때인 거 같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노란색 전집을 구입했습니다. 앞에 이렇게 간략한 글을 적어두기로 했습니다.

 

    불현 듯

    기억이 얼음처럼 느껴진다

    침묵하는 산을 바라본 후 뒤돌아선다

    남은 자의 발자국만이 바위를 붙잡고 있다

    당신은 거기서 5월을 무사히 지냈다

 

원래는 노란 이야기를 전하려고 했으나 10년이 지났지만 10년은 더 지나야할 듯합니다. 그때를 기약합니다.

 

 

- 시 쓰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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