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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동 : 2005-2009, 공백, 2012-2013_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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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2,277회 작성일 18-08-09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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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8.08.09 에세이

용호동 : 2005-2009, 공백, 2012-2013

현 수

 

 

1. , 2005-2009

 

2005년부터 2009년까지 4년간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지내는 동안에 내 집이 있었던 건 대연동 경성대학교 앞이었지만, 사실상 생활의 중심은 용호동이라 할 만했다. 어느 날씨 좋은 봄날 교무실 의자에서 일어나 환하고 포근한 창 너머를 바라보면서 학교라는 곳에 갇혀 있는 건 애들만이 아니지란 생각에 한숨을 내쉴 정도로 건물 안에만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갇힌 동네다. 용호동은. 동으로 장산봉, 서로 봉오리산, 남으로 신선대 유원지가 서로 다 이어져서 동네를 둘러쌌다. 남쪽과 동쪽, 북쪽은 바다다. 전체 구역 중 북서쪽 작은 일부분만 평지로 시내와 연결되어 있는. 그래서 문둥촌이 되었나 보다. 나환자들을 가둬놓기 딱 좋은 지형이니까. 당시만 해도 나는 그것이 오랜 과거의 일이라 생각했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가 용호동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그때까지도 한센병 환자들이 살았던 용호농장 일대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철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니, 나도 참 그 동네에 무심했었구나 싶다.

그때 내가 용호동에서 살고 거닐었던 곳은 내 직장인 학교로 가는 길밖에 없긴 했다. 남쪽의 신선대 공원은 내가 손꼽은 명경지였고, 동쪽의 이기대도 그때까지만도 부산 사람들조차 존재를 모르는 절경이었으나 내가 사는 곳이라고 할 정도로 매일 가진 않았다. 학교는 낮은 용호동 건물들을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 높이의 산지에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얻은 첫 직장인 교사는 벌이로도, 사회적 시선으로도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직업 중에 가장 위라 할 만했다.

아이들은 순박했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폭력 사태가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며 세대 단절의 대명사로 꼽히던 분위기가 무색하게, 이 학교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면 교무실로 다다다 달려와서 좋아하는 선생님들에게 말 한 번 걸어 보려 했다. 수학여행을 갔다 하면 모든 선생님들이 모든 반의 담임처럼 사진이 찍힐 정도였다. 당시 나는 이 아이들의 모습이 일반적인 학생들의 모습일 거라 믿었다. 뉴스에 나오는 건 자극적으로 발굴한 글감이지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닐 거라고 말이다.

작은 동네에 사니까 선생님을 연예인처럼 따른다는 말은 선생님들 사이에서 왕왕 나왔다. 다른 학교에서 온 선생님들도 이 학교 애들은 유독 그렇다고들 했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에 대해서는 비논리가 힘을 얻곤 하는 법이다. 나도 그 비논리에 순순히 따랐다. 어떤 곳은 동네가 동네 사람들을 보여 주고, 동네 사람들이 곧 동네이기도 하니까.

나의 교사 생활은 끝이 예정되어 있었다. 기간제 교원 4년째. 내가 2008년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게 2학년이었고, 지나다니면서 날 보고 기억하던 1학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애들은 결국 2011년이면 졸업한다. 3년이 지나면, 이 공간에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곳에 있는 천여 명 중에 몇 십 명에 불과해지는 곳이다. 용호동에서 내 존재의 흔적은 그 학교에만 남아 있었기에, 나는 3년 만에 그곳과의 인연이 거의 끝났다.

 

 

2. 바닥, 2012-2013

 

3년간 나는 장전동으로 돌아가서 프리랜서로 하루하루 보내며, 작가가 되겠다고 소설만 쓰고 앉았다가 교사 생활을 하며 모은 돈을 거의 다 써 버렸다. 다음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서, 믿었던 사람이 동업을 제안해 왔다.

용호삼성시장 건물은 용호동 본동으로 들어가는 초입께에 있었다. 그 유명한 할매팥빙수집 말고는 부산의 여느 동네 시장과 마찬가지로 쇠락한 곳이었다. 특히 이 삼성시장 내 복합상가건물은 들어서 있는 가게들이 연명 수준으로 가고 있었다. 학교에서 내려다보이던 낮은 용호동 건물들 안에서도 또 블록 안쪽의 건물 안쪽, 비어 있는 한 칸이었다. 건물 밖으로 난 창 하나 나 없는 자리에서 술집 장사를 시작하면서 평생 신세를 지지 않겠다 다짐했던 아버지에게 집세 때문에 손을 벌렸고, 사방의 친구들에게 얼마씩 돈을 빌려서 덕트도 설치하고 주방도구도 갖췄다. 벽지까지 직접 다 발랐고, 조리용 바는 내가 직접 설계해서 나무를 사다가 만들어서까지 돈을 아꼈다.

3개월 만에 동업자와 싸우고 그만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나대로 어리고 어리석었고, 동업자는 동업자대로 처음과 말이 달랐다. 나는 한 번 고집이 나오면 절대 꺾이지 않는 성격이었던지라, 동업자의 짜증을 곧이곧대로 적의로 받아들였다. 3개월 간 월급은 교사 생활 1개월 월급도 못 되었고, 나오면서 회수한 돈은 60만 원이었다. 평생의 자랑이었던, 빚 없이 사는 삶이 깨어졌다. 사기를 당하지 않아도 이렇게 털어먹을 수 있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로부터 2013년에 새로 취직을 할 때까지 나는 백수 폐인을 자처하고 살았다. -시장으로 이어지는 용호동은 이때부터는 집-슈퍼로 좁아졌다. 일자리가 잘 구해지지 않는다면서 노력도 안 하고 살았다. 2012년 한해는 통째로 바닥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길 원치 않는다고 연인은 말했다. 좀 더 노력해 달라는 그녀의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고 나는 못하겠다고 했다. 아무 것도 못 벌던 그 일 년 동안 나를 먹여 살려준 사람을 그렇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 바닥으로 끌어내려진 게 아니라, 잘 덮어 두었던 바닥을 스스로가 연 거였다.

그렇게 헤어지고 바로 다음 달에 새로운 직장을 얻고 이사를 하면서 마침내 용호동 바닥을 떠났다. 그래서 나에게 용호동이 어떤 곳이냐고? 용호동은 이기대다. 산을 등으로 지고 앞에 펼쳐진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를 내려다보는 곳. 그 산 너머 어딘가쯤에 내 낮은 삶을 묻고, 그 너머 어딘가에 내 좋은 시절도 묻은. 지금은 그렇게 가만가만히 바라보고 있게 되는 곳 말이다.